빈 옷장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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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전작 읽기에 도전 중이고, 이제 몇 권 안 남았다. <빈 옷장>은 아니 에르노가 1974년에 발표한 첫 소설로, 전작 읽기에 도전 중인 사람으로서는 작가의 첫 책에서 시작하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막상 읽어보니 문체나 형식 면에서 나중에 출간된 책들에 비해 훨씬 낯설고 어려운 면이 없지 않고, 내용도 아니 에르노가 이후에 발표한 책을 읽고 나서 읽으면 더욱 잘 이해되기 때문에 (전작 읽기 도전) 후반에 읽은 게 정답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스무 살 대학생인 화자가 임신 중절 수술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 불법이었던 낙태 수술을 받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정신을 잃어가는 화자는 꿈을 꾸듯 과거로 돌아간다. 식당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며 외동딸을 키운 부모. 그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입학한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화자는 우수한 성적과 치열한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힘든 계층 간의 경제적, 문화적 격차를 깨닫고 깊은 열등감, 결핍감에 시달린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지면, 시골이 아닌 수도에 살면 이 모든 차이나 차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대학에서 만난 남자친구로 인해 임신을 하고, 몇 달 사이에 장래가 촉망되는 대학생에서 불법 낙태 수술대에 오르는 신세로 전락한 화자는 "내가 배웠던 모든 것에 구역질이 난다. 나는 사방에서 농락당했다."(15쪽)라고 느낀다. 


그러나 화자에게 있어 진정한 고통은 낙태 그 자체가 아니라, 낙태를 한 후에도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부모와 사회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적어도 경제적으로 자립할 때까지는. 아니 어쩌면 그 후에도 영원히 자립할 수 없을 것 같은(교사가 되면 경제적 자립은 가능하겠지만, 애초에 교사는 부모가 자신에게 바란 직업이지 자신이 원해서 택한 직업이 아니므로 '자립'한 삶이라고 부를 수 없다) 강력하고 불길한 예감. 


문학도로서 자신이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공부해온 문학에 대해 회의하는 대목도 나온다. "빅토르 위고나 페기처럼 교과 과정에 있는 작가를 공부해 볼까. 구역질이 난다. 그 안에는 나를 위한 것, 내 상황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9쪽) 읽을 것은 많지만 정작 '나를 위한' 읽을 것은 없다는 발견과 인식이 작가를 만들고 창작물을 낳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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