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말 혹은 침묵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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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에 출간된 아니 에르노의 두 번째 소설이다. 주인공은 '안'이라는 소녀인데, 아니 에르노의 첫 번째 책 <빈 옷장>의 주인공 '드니즈'와 마찬가지로 작가 자신의 출신 배경과 성장 과정, 실제 경험 등을 많이 반영하여 만든 - 사실상 작가 자신과 거의 동일한 - 인물로 보인다. 


중학교 졸업 학년인 안은 학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이지만,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몇 안 되는 프롤레타리아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안의 부모는 안이 학교 아이들에게 잘 보이도록 새 원피스를 사달라고 하거나 친구들과 놀러 가겠다고 하면 공부나 하라고 야단치고, 그럴수록 더욱 더 깊은 열등감과 반항심을 느끼게 된 안은 시험이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면 기필코 학교 아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뜨거운 연애(+첫 경험)를 하겠다고 결심한다.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십 대 청소년이 주인공인 성장 소설(및 영화, 드라마 등)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변주된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다 만난 남자아이와 썸을 타다가 헤어지고, 또 다른 남자아이와 썸을 타다가 이번에는 좀 더 진도를 나가보고 그러다 또 헤어지고... 그렇게 몇 번의 연애를 거듭하다가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되는 이야기, 라면 로맨스(라는 이름의 판타지) 소설이 될 텐데, 이 소설이 로맨스 소설로 분류되지 않는 건 로맨스 이상(또는 이외)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방학 동안 몇 명의 남자와 아주 짧은 연애를 즐긴 안은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충격을 받게 된다. 첫째는 자신의 계급에 대한 인식인데, 이는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 자신은 노동자 출신인 상인 부모 슬하에서 자라서 중상류층의 언어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습득하지 못했고 그만큼 뒤처져있다는 - 자각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식이다. 둘째는 자신의 성별에 대한 인식인데, 이는 외동딸로 자랐고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안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안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사회가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연애라는 일대일 관계에서조차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e.x. 남자가 여러 여자를 만나면 능력 좋다는 소릴 듣고, 여자가 여러 남자를 만나면 걸레라고 불리는 것) 


방학이 끝나고 고등학생이 된 안은 겉으로는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하지만, 속으로는 예전에 믿었던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읽고 싶지 않고 쓸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이 책의 15페이지에 나온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걸 느긋하게 맞이하고 누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진리를 왜 그 때는(어쩌면 지금도) 몰랐을까(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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