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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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가 1991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작가가 48세였던 1988년에 13세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던 경험을 '솔직하게' 썼다. '솔직하게' 썼다고 했지만 그 시절의 경험이나 감정을 그대로 온전히 담지는 않았다는 것은 <단순한 열정>이 출간된 지 10년 후에 발표된 <탐닉>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상대 남성의 국적을 비롯한 사소한 습관과 취향까지 적나라하게 공개한 <탐닉>에 비하면, <단순한 열정>은 차라리 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용이 정제되어 있고 추상적이다. 


2015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상대 남성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지나치게 크게 의식되어 정작 중요한 작가의 감정 변화에는 집중하지 못했던 것 같다. 8년이 지난 2023년에 이 책을 다시 읽으니 작가가 처한 상황이 마치 나의 경험처럼 생생하게 와닿았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지난 8년 동안 30대 초반에서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여성으로서 육체적, 정신적인 노화를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 사이 한 번의 연애를 경험하면서 사랑에 대해, 남자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상대 남성과 처음 만났을 때 작가는 18년 간의 결혼 생활을 마치고 이혼한 상태였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여전히 활력이 있고 매력이 있다고 느꼈지만, 장성한 두 아들이 있는 오십을 바라보는 여성을 성적 매력을 가진 대상으로 보는 남자는 많지 않은 것이 (이 때나 지금이나)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 남자를 만났는데, 이 남자의 외모와 육체가 너무나도 자신의 이상형에 부합한다. 심지어 그 남자가 자신과 잠자리를 가지고 싶다고 말한다. 안 되는 걸 알지만, 이런 남자 이런 사랑은 자신의 삶에서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여기며 빠져드는 마음. 아 너무 알 것 같아... 


그러나 어느 영화에 나오듯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어서, (처음부터 그 남자에 대한 나의 사랑보다 뜨겁지 않았던) 그 남자의 사랑이 식어가는 게 자신에게도 전해지고, 자신 또한 세상의 모든 풍경 모든 소리 모든 향기가 그 남자에게서 비롯되는 것처럼 인식되던 마법 같은 시간이 끝나감을 느끼면서, 이 허망한 바보짓을 얼마나 더 반복해야 삶이 끝날까 싶으면서도, 적어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는 아니었기를, 살면서 한 번만 더 이런 마법, 이런 사치를 경험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기원하는 마음을 가져본 건 설마 나뿐일까.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6-7쪽) 


내가 보기에 아니 에르노는 크게 두 가지 주제에 관한 글을 쓰는데, 하나는 자신의 과거(부모님, 고향, 학창 시절, 낙태 경험 등)에 관한 글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현재(연애, 간병, 투병, 죽음 등)에 관한 글이다. 과거에 관한 글은 주로 물질적 빈곤과 경제적 불안에서 비롯된 결핍감에 대한 내용인 반면, 현재에 관한 글은 작가가 물질적 빈곤을 해소하고 경제적 안정을 상당 부분 성취한 후에도 극복하기 힘든(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룬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연애가 간병, 투병, 죽음 등과 하나의 연장선상 위에 놓인 문제가 된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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