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말부터 이번 달까지(아마 다음 달까지도) 아니 에르노의 책들을 열심히 읽고 있다. 2015년 <단순한 열정>을 읽었을 때는 이 작가의 무엇이 대단한지, 이 작품의 무엇이 좋은지 잘 몰랐는데, 7년 여의 세월 동안 내 안의 무엇이 바뀌었는지 이제는 아니 에르노의 이름으로 나오는 모든 책과 글을 모조리 읽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심정이다(절대 불가능하겠지만...).


<남자의 자리>는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쓴 책이다. 이 책은 아니 에르노가 중등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두 달 후 아버지가 사망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대부분의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에르노 역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가난했고, 많이 배우지 못했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다(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 적도 있다). 책과 공부에 빠져 있는 딸을 이해하지 못했고, 딸에게 하루빨리 직장에 들어가서 돈을 벌어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런 아버지로 인해 아니 에르노는 성장하는 내내 결핍감과 열등감에 시달렸고,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를 진심으로 좋아하거나 존경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아니 에르노의 삶에서 아버지가 그저 걸림돌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비슷하게 시작한 공장 노동자 중에선 드물게 식당 겸 식료품을 인수해 상인 계급에 편입되었고, 밤낮은 물론이고 휴일과 주말도 없이 일했다. 하나뿐인 딸을 상류층에 진입시킬 목적으로 공립학교가 아닌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보냈고 (그 시대의 딸 가진 부모로서는 드물게) 대학 교육까지 받게 했다. 


아니 에르노는 가난하고 못 배운 아버지를 오랫동안 멸시하고 증오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이 아버지를 멸시하고 증오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돈을 벌고, 좋은 학교에 보내주고,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편안하게 공부할 환경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아버지가 완벽하고 훌륭한 인간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딸에게만은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비로소 인정한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또 다른 책 <부끄러움>에서 열두 살 때 집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 직후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내 불행을 벌어놓은 거야."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랬던 딸이, 자신의 불행뿐 아니라 행복도 아버지가 벌어놓았다는 사실을 납득하기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 에르노의 다른 책들을 부지런히 읽으며 알아가는 것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