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헤매는 마음
임승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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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다. 어릴 때는 연말이 되면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서 한 살 더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멈추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다. 한 해 동안 하루도 온전히 쉰 적이 없는데도 손에 쥔 것은 많지 않고, 이대로라면 내년에는 더욱 막막한 생활이 이어질 거라는 불안감이 강하게 든다. 여기에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는 체력과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부모님의 모습... 이런 나를 본다면 누군가는 '헤매고 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15년 차 방송작가 임승주의 산문집 <기꺼이 헤매는 마음>의 제목을 보았을 때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헤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구나 싶었고, '어차피 헤매는 것, 기꺼이 헤매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책을 읽으며 상상한 저자의 모습은 자유분방한 사람보다는 성실한 모범생에 가깝다. 인생 최대의 일탈이 학창 시절 좋아하는 농구 선수의 경기를 보기 위해 야간 자율 학습을 빠진 것이고(그것도 딱 한 번), 할 일이 많아서 머릿속이 복잡할 때에는 TO DO LIST를 만들거나 다꾸를 하고, 커피 한 잔 고를 때에도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아이스 카페라테만 주문한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마도 나와 MBTI가 같거나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혹시 ISFJ?). 


뭐든 계획대로 하는 것이 좋고 계획대로 안 되면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니 큰일이 생길 때는 물론이고 작은 일만 생겨도 혼란을 느끼고 헤맬 수밖에. 작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첫 직장을 박차고 나와 방송아카데미 구성작가 과정에 등록했지만 예상과 다르게 수업 내용이 흘러갔을 때, 어렵게 섭외한 인터뷰이가 갑자기 거절을 해오거나 예측 못한 일이 생겨서 준비한 원고가 소용없게 되었을 때, 갑자기 병이 나서 스케줄에 차질이 생겼을 때 얼마나 당황하고 힘들었을지 너무나 공감이 되고 내 일처럼 안타까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추억이 되고 교훈이 남는 건 어째서일까. 저자는 방송아카데미 시절 쓸데없다고 느꼈던 수업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고, 유난히 애를 먹은 촬영이 가장 보람 있었고, 아파서 쉴 수 밖에 없었던 시간들 덕분에 절이나 교회, 사원 등에서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기도하고 기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쓴다. 그러니 삶이 태클을 걸어올 때마다 '기꺼이' 걸려 넘어져도 괜찮다고 말한다. 


"앞으로는 이해 가능한 슬픔의 영역이 더욱 넓어지면 넓어졌지, 좁아지진 않을 것이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이별하고 세상 무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슬픔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이기에, 그것에 성장이라 이름 붙이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에 오늘의 우리는 다들 힘들고, 그 힘들다는 이야기를 나는 이렇게나 길게 길게 쓰고 있다." (246-7쪽) 


올해는 힘들었지만 내년에는 더 힘들 수도 있고, 어쩌면 매년 점점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그 때마다 무너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점점 더 강해지는 내가 되기를(암 안티프래질~ 안티프래질~). 헤매지 않고 지루하게 살기보다, 기꺼이 헤매며 즐겁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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