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김선지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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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옷을 벗어야 하는가?" 미국의 여성 미술가 그룹 '게릴라 걸스'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된 여성 예술가의 작품은 전체 소장품의 5퍼센트에 불과한 반면 누드 작품의 85퍼센트는 여성 누드임을 지적하면서 내건 문구다. 이 문구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남성 화가의 이름은 열 명, 스무 명도 넘게 떠올릴 수 있지만 여성 화가의 이름은 단 한 명도 떠올릴 수 없다는 사실과, 그 남성 화가들 대부분이 여성 누드를 그렸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웠다. 


서양(더 정확히는 유럽과 미국)의 역사를 '세계사'라고 배우는 것처럼, 서양 '남성' 화가들의 역사를 '미술사'라고 배워왔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미술사'에 기록되지 않은 여성 화가들의 역사가. 마침 이 책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를 만났다. 저자는 책에서 르네상스부터 20세기 초 현대 미술의 태동까지 미술사에서 사라진 여성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소개한다. 미술사에서 중심 역할을 해온 회화와 조각에서 패션, 공예, 디자인 분야까지 아우른다. (동양의 여성 화가는 없고 서양의 여성 화가들만 소개되어 있는 점은 아쉽다.) 


후대에까지 널리 알려진 여성 화가가 전무한 이유는 여성 화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미술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남성들이 독점하다시피 했지만 극소수의 여성 화가가 존재했고 이 중에는 궁정 화가로 발탁되어 이름을 떨친 인물도 몇 명 있다. 대표적인 예가 소포니스바 앙귀솔라이다. 북이탈리아의 부유한 하급 귀족의 딸로 태어난 앙귀솔라는 아들딸 구별 없이 교육하고 후원했던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미술 교육을 받아서 당시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천재로 유명한 미켈란젤로도 앙귀솔라의 그림을 보고 칭찬했다고. 


그러나 이것은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의 사례 중 가장 좋은 것이고, 대부분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하거나, 힘들게 화가로서 자리를 잡아도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 때문에 경력이 단절되거나(출산하다가 사망한 경우도 많이 나온다), 남성 화가들처럼 실력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외모나 사생활로 평가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남성 화가는 남성의 누드, 여성의 누드 모두를 그릴 수 있는 반면, 여성 화가는 남성 누드를 그리면 성생활이 문란하다는 말을 듣고, 그리지 않으면 실력이 부족해서라는 말을 들었다. 


여성 화가의 작품이 그의 아버지, 남편 또는 남자 형제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많다. 베를린 다다이스트 그룹의 일원이었던 한나 회흐는 그 자신이 훌륭한 예술가임에도 라울 하우스만의 애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북유럽 인테리어의 시초로 알려진 카린 라르손 역시 남편 칼 라르손의 명성에 가려져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이제까지 남성 화가들의 역사만 공부해 왔다니. 원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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