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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ㅣ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평점 :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통받은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항상 '그 다음'이 궁금했다. 차별받고 학대받고 희롱당하고 폭행당하고 강간당하고 죽임당한 후의 일이. 어쩌면 오랫동안 범죄소설이라는 장르에 탐닉한 이유도 (대부분이 여성인) 피해자의 '그 다음'이 궁금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실에선 좀처럼 잡히지도 않고 잡혀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가해자들을 어떻게든 잡아내서 처벌하는 사람들을, 허구로라도 보고 싶었달까.
최진영 작가가 2019년에 발표한 소설 <이제야 언니에게>를 읽을 때에도 주인공 제야의 '그 다음'이 궁금했다. 제야는 평범한 열일곱 살 여학생이었다. 집에선 장녀로서 여동생과 사촌동생을 살뜰히 보살피고, 학교에선 방송부 활동을 하며 방송 작가를 꿈꿨다. 그런 제야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고, 제야에게 곧잘 용돈을 주거나 학교까지 차로 태워다 주곤 했던 당숙이 제야를 성폭행한 것이다.
성폭행 피해자가 어떤 일을 겪는지는 독자도 작가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가해자와 주변 인물들의 2차, 3차 가해가 이어지고, 학교(혹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족마저 등 돌리는 상황이 제야에게도 펼쳐진다. 이런 상황에서 제야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분노를 느낄지도 어렴풋하게 알 수 있다. 낯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이 사람들 중에도 있지 않을까. 그런 짓을 한 사람이.'라고 의심하게 되는 마음, 가해자도 나쁘지만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는 사회에 더 큰 배신감과 절망을 느끼는 마음도 모르지 않는다.
"나는 내 인생 최대 불행이 강간당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 인생 최대 불행은 이런 세상에, 이런 사람들 틈에 태어난 거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른이라고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하고 어른이 하는 말이니까 들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싹수가 노란 거고 애당초 글러먹은 애가 되는 거고. 당숙이 악마여서 나를 강간한 게 아니다. 여기서는 그게 강간이 아니니까 강간한 거다. 당숙이 당당한 건, 가해자면서 희생자인 척 구는 건, 이 세계에서 아주 당연한 문법인 거다." (206쪽)
그러니까, 이 소설을 읽기 전에도 읽는 동안에도 궁금했던 건, 작가가 제야의 '그 다음'을 어떻게 상상할지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작가가 상상한 제야의 '그 다음'이 최고는 아니어도 최선의 결말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나도 제야는 그 사건을 떨쳐내지 못한다. 대학에 들어가도 그 사건이 따라 붙고, 남자친구를 만나도 계속해서 그가 생각난다. 그래서 죽으려고도 해보고 죽이려고도 해본다. 이 과정에서 제야는 깨닫는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야말로 가해자가 가장 원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가해자와 달리, 자신은 누구를 함부로 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제야는 또한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다. 세상에는 제야처럼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고, 그들 또한 제야처럼 그저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삶이 고통스럽고 사람이 무서운데도 끝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제야도 그 사람들도 나도 아직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고 나를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저 그것만 생각하면서 하루에 하루씩만 살아보자는 것. 이건 다른 누구보다도 나에게 하는 당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