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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 이순자 유고 산문집
이순자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5월
평점 :

주변 어른들이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하실 때면 하나하나가 한 편의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여성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그렇다. 겉보기엔 유복하고 평탄한 삶을 살아오셨을 것 같은 분이, 어릴 적 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철모르는 나이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 호된 시집살이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누구에게나 각자의 고통이 있고, 그러니 타인의 삶을 함부로 넘겨짚거나 동정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책은 62세에 취업 전선에 나선 경험을 담은 수필 <실버 취준생 분투기>로 2021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당선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얼마 뒤 세상을 떠난 이순자 작가의 유고 산문집이다. 책에는 그가 작가의 꿈을 안고 마지막 순간까지 써 내려간 삶의 기록이 담겨 있다.
이순자 작가의 초년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에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 사정 탓에 밥 대신 물로 배를 채운 적이 많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청각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각자 살기 바쁜 가족들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결핵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나섰지만, 청각 장애가 있는 여성을 사무직에 채용하는 회사가 없었다. 첫사랑도, 결혼 생활도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했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했을 때, 그의 나이 54세. 4대가 함께 사는 종갓집 며느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산 세월이 남긴 것은 이혼의 고통과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현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자의 삶은 이혼을 계기로 바뀌었다. 이혼 후 절망에 빠진 그에게 딸이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공부를 해보라고 제안했다. 사회복지학과를 나와서 관련 자격증을 취득해 취업하는 게 최선으로 보였지만, 속으로는 문예창작학과에 끌렸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꿈을 늦게라도 이루고 싶었다. 사이버대학교의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한 그는 부지런히 글을 썼다. 생계를 위해 일을 나가고, 봉사를 하러 다니는 와중에도 틈틈이 글을 썼다. 그 결과 여러 매체에 글을 발표하고, 전국 장애인문학제 대상,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꿈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이런 성취,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
책을 읽는 동안 이순자 작가의 노력과 열정에 감동하는 한편으로,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글이란, 어릴 때부터 전문적으로 글쓰기를 교육받은 작가의 글이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글로 기록한 저널리스트형 작가의 글이다. 더욱이 이순자 작가는 여성이고 장애인이고 노인이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을 가지지도 못했다. 지금 한국에서 발표되는 글 중에 남성, 비장애인, 고학력자,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사람 이외의 관점과 경험을 반영한 글이 얼마나 될까. 이 책에 실린 <실버 취준생 분투기>처럼 사회 각계각층의 삶을 조명한 글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순자 작가의 삶은 산문집 한 권과 시집 한 권으로 남았지만, 이 책을 읽은 나는 그의 삶이 단 두 권의 책으로 정리될 만한 것이 아님을 안다. 그가 살면서 겪은 고통, 흘린 눈물, 베푼 사랑과 인정, 용서 등등을 어떻게 이런 책에 다 담을 수 있을까. 이순자 작가의 치열했던 생애와 노력이 결국 빛을 보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작가 자신이 책의 완성과 출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