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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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주에 갔던 때를 기억한다. 열 살 때였나. 가족 여행으로 제주를 찾아 한라산에 올랐는데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기온은 물론 주변 경관이 크게 바뀌어서 놀랐다. 산 아래는 여름, 중턱은 봄가을, 정상은 겨울인 느낌이었달까. 깊이 들어갈수록 서늘한 건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 속의 제주는 사람들이 관광과 휴식을 위해 찾는 제주와 전혀 다른 분위기다. 제주 하면 떠오르는 이국적인 풍경, 온화한 날씨, 한가롭고 다정한 분위기 같은 건 적어도 이 소설에는 없다. 그보다는 육지 사람들이 알지 못했거나 무심히 지나쳤던 제주의 참혹한 역사와 그 흔적이 여실히 나온다.


5.18 광주에 관한 소설을 발표한 경하는 오랫동안 깊은 우울에 시달리다 죽음을 결심하고 신변을 정리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시절 각별하게 지냈으나 이제는 예전과 같은 사이가 아닌 친구 인선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사진작가였다가 몇 년 전 목수가 된 인선의 오른손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확인한 경하는 기르는 새에게 먹이를 달라는 인선의 부탁을 받고 제주로 간다. 공교롭게도 경하가 도착한 날 제주의 날씨는 엄청난 폭설. 눈보라를 뚫고 힘들게 제주 중산간 지방에 있는 인선의 작업실로 간 경하는 그 날 이후 인선의 가족사를 통해 제주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알게 된다. 


소설은 높이 오를수록 숨쉬기가 힘들고 한 발 떼기가 고통스러워지는 한라산처럼, 후반부로 갈수록 맨정신으로 감당하기 힘든 역사를 보여준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 또는 다를 거라는 의심만으로 자신과 같은 국적과 역사와 언어를 공유하는 수십,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을 '절멸'에 가깝게 학살한 사람들. 그들은 제주도민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끼리 죽이고 죽게 만들었다. 한때는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던 동네인데 4.3 사건으로 주민들이 거의 다 죽거나 떠나서 한 마을에 서너 집 정도밖에 남지 않은 곳이 많다는 문장을 읽으며, 지금의 육지 사람들이 제주에서 느끼는 한적함이나 여유로움의 실체를 알게된 것 같아 등골이 서늘했다. 인선이 사는 마을 노인들이 경하가 쓰는 표준어만 듣고도 표정이 어둡게 변하며 피하는 것도 그들이 불친절해서가 아니라 칠십 년 전의 사건이 남긴 방어 기제일 테다. 


이러한 식의 국가 폭력과 국가를 방패로 한 국민 간의 폭력이 겨우 칠십 년 전에 일어났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그 후로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끔찍하다. "그런 지옥"을 만든 것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지지만, "그런 지옥"을 겪고도 선한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로 한다. 세상 어느 곳에나 공평하게 내리는 눈처럼, 녹아서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내리는 눈처럼, 끝내 이별하고 싶지 않은 것들과 작별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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