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런웨이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6
윤고은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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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로 더 이상 드나들지 못하게 된 장소가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도서관이다. 팬데믹 이전에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 들러서 서가를 둘러보고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살펴보는 것이 취미였는데, 팬데믹 이후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면 안 하는 쪽으로 선택을 하다 보니 취미였던 도서관 가기가 더 이상 취미가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윤고은 작가님의 신작 제목이 <도서관 런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반갑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도서관이 주 무대인 소설은 아니고 주인공이 도서관 서가 사이를 런웨이하는 취미(?)를 가진 인플루언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역시 윤고은 작가님답게 기발하고 재치 있는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여행사 직원인 안나는 도서관 서가 사이를 패션쇼에서 모델이 런웨이하듯 걸어가는 장면을 SNS에 올리는 것으로 소소하게 화제를 모으는 북스타그래머이다. 그런 안나가 미국 여행길에 만난 남자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사라지고, 안나와 함께 북클럽을 하던 지인이 안나를 찾기 위해 안나의 대학 시절 친구인 유리에게 연락을 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유리는 안나의 행방을 추적하다가 안나가 사라지기 전 도서관에서 <AS안심결혼보험>이라는 제목의 책을 대출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범한 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보험상품의 약관집이며, 시중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리는 안나가 심상치 않은 일에 말려들었을지(또는 스스로 뛰어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과연 안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소설은 유리가 <AS안심결혼보험>을 단서로 안나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과 <AS안심결혼보험>의 내용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결혼을 보험 대상으로 본다는 발상이 코믹하게 느껴졌는데, 보험금 환급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으면 관성적으로 했을) 예단이나 예식을 생략하거나 얼굴도 모르는 친척의 관혼상제에는 참석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작금의 결혼식 및 결혼 생활이야말로 웃기는(이라고 썼지만 사실은 웃기지도 않는) 요소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웃기는 건, '결혼'보험이지만 가입 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으면 원금의 130퍼센트를 보장해 준다는 것. 이걸 노리고 결혼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 결혼보험에 가입하는 경우도 있다니. 실제로 있다면, 가입하고 싶을지도? 


결혼보험이 도입됨으로써 기존의 결혼 제도가 흔들리고, 팬데믹이 퍼짐으로써 팬데믹 이전 생활에 대한 회의가 늘어나고.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의 도입 혹은 발발로 인해 변화하고 붕괴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솜씨 또한 훌륭하다. 조금 전까지 이름도 몰랐던 남녀와,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도서관을 생각해낸 것도 대단하다. 여행지에서 일부러 도서관에 갈 정도로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애정이 있고,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수천, 수만 권의 책 중에 똑같은 한 권의 책을 고른 사람들이라면, 사랑이든 사건이든 뭔가가 시작되기에 충분한 조건 아닐까. 우연이 운명이 될 수도 있는 곳. 도서관에 가보고 싶다,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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