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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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별이 얼마나 떨어져 있든 도착할 빛은 결국 도착하듯이, 사람과 사람도 얼마나 떨어져 있든 전해져야 할 사랑은 결국 전해지기 마련이다. 최은영의 소설 <밝은 밤>은 증조할머니에게서 할머니, 엄마, 나로 이어지는 사랑의 내력을 전한다. 


삼십 대 여성 지연은 이혼 후 할머니가 살고 있는 희령으로 직장을 옮긴다. 어릴 때 잠시 할머니 댁에 묵었던 기억을 좋게 간직하고 있는 지연은, 이후 할머니와 어머니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할머니와 소원하게 지낸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우연히 할머니와 마주친 지연은 타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랠 겸 할머니와 종종 만난다. 그러다 할머니를 통해 증조할머니와 할머니, 어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지연은 할머니와 어머니,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 깊은 골이 왜 생겼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백정의 딸이었던 증조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양민 남자와 개성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대구로 갔다가 희령에 정착해 그곳에서 증조할아버지가 소개해 준 남자와 결혼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남자는 이미 아내와 아들이 있는 상태였고, 졸지에 두 번째 부인이 된 할머니는 딸을 남자의 호적에 올려주는 조건으로 양육비 한 푼 못 받고 혼자서 딸을 키우게 된다. 그렇게 평생 아버지가 있어도 없는 상태로 살아야 했던 어머니는 여자에게 반드시 남편과 자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런 어머니의 눈에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이혼하고 자식도 없는 지연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그렇게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서운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서, 지연은 엄마와 화해하고 싶지만 화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희령에서의 한 시절을 보낸다. 


엄마와 딸 사이는 왜 이럴까. 개인의 성격이나 상황 또는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서 엄마와 딸 사이가 번번이 잘 풀리지 않은 데에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제약 내지는 제도적 차별 문제가 분명히 있다. 소설 속 엄마들은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법적으로 하자가 있는 남편일지라도 이들이 꼭 필요했다. 이때만 해도 호주제가 존재했기 때문에 여성은 호주가 될 수 없었고, 남편이 없으면 자기 자식이 '아비 없는 자식'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남편 없이는 온전히 제 자식을 품을 수 없었던 엄마는, 여자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차별받고 무시당한 딸을 더욱 강하고 모진 사람으로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상처받기보다 상처 주는 사람이 되길 기대받으며 성장한 딸들이 제 엄마와도 충돌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닐까. 문제는 그렇게 강하고 모진 태도가 딸 자신에게 상처를 줄 때조차 엄마에게 기대거나 위로받길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엄마와 딸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환상처럼 느껴지는 내게는 <밝은 밤> 속 모녀들의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소설에는 새비, 희자, 명숙처럼 혈연은 아니지만 피보다 진한 우애를 나눈 여자들도 등장한다. 전쟁 때문에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고 가난 때문에 제 식구 먹고 살 것도 없던 시기에, 이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잠자리를 기꺼이 내주고 먹을거리도 나눴다. 아버지가 외면하고 남편이 무시해도 함께 손잡고 어깨를 두드리며 힘든 세월을 버텼다. 친할머니, 친엄마, 친딸, 친손녀가 아니어도 서로 통하는 것이 있으면 기뻐하고, 이를 우연이 아니라 천운처럼 느끼고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스스로 별이 되어 주위를 밝혔다. 별처럼 빛난 여자들이 있어서 내가 있고 오늘이 있다. 마침내 도착한 이 사랑 이야기가 오늘의 여자들을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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