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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다. 여자라는 이유로 죽이지 말아 달라는 당연한 주장에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질 때마다, 여자도 사람이다, 아기 낳는 도구가 아니라는 말에 날선 표정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그 말을 떠올리며 성난 마음을 가라앉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럴수록 더 읽고 쓰기로 한다. 나를 일깨워준 작가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먼저 맞은 화살과 피 흘린 가슴과 여전히 낫지 않은 상처를 상상하며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는다. 당신도 이렇게 힘들었습니까.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길을 먼저 걸으면서 얼마나 아팠습니까. 눈물이 차오르는 눈을 힘겹게 뜨고 당신이 겪은 일을, 목격한 현실을 기록해 남긴 뜻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같은 말을 속으로 되뇌며 나를 밀어내는 세상 안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어둡지만 내일은 좀 더 밝으리라는 희망을 붙들고.
조남주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쓴 것>에는 나처럼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삶을 사는 다양한 여성들이 나온다. 남아 선호사상 때문에 환갑이 넘을 때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동주(<매화나무 아래>),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악플러들의 괴롭힘을 당하는 '나'(<오기>),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가서 난처해하는 '나'(<가출>), 회사 전체를 통틀어 업무 능력이 가장 우수하지만 여성이고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가장 적은 월급을 받는 미스 김, 나이가 어리고 지방 출신이고 학교 후배라는 이유로 남자 친구에게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한 '나'(<현남 오빠에게>), 자신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느꼈던 압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딸을 보며 착잡해하는 효경(<오로라의 밤>), 교내 성폭력 사건에 연루된 딸을 지켜보는 '나'(<여자아이는 자라서>), 팬데믹 때문에 학교에도 못 가고 집안의 재정 사정도 악화되어 첫사랑과 헤어질 위기에 처한 서연(<첫사랑 2020>) 등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자주 답답했고 끝내 울컥했다. 어떤 사람들은 성차별이 윗세대에나 있었고 지금 세대에는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80년대 중반에 태어났는데도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서운해했고, 둘째도 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뱃속의 아이를 지우자고 말했다. 이번에는 아들일 거라고 기대하고 셋째를 임신했지만 이번에도 딸이란 걸 알게 되자 어머니는 아이를 지웠고 할머니는 씨받이를 들이겠다고 했다. 나와 내 동생이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모범적으로 학교생활을 해도, 할머니에게 우리 자매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아 종국에는 자기 아들 고생시킬 계집애들'에 불과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할머니와 같이 살지 않은 덕택에 할머니의 싸늘한 눈빛을 받는 건 명절이나 제사 때 정도였고, 나의 부모님은 차별 없이 우리 자매를 키워주셨다. 하지만 대학을 선택할 때 "여자는 공학보다 여대가 낫다."라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 직업을 고를 때 "여자 직업으로는 공무원이나 교사가 최고다."라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선명하다. 외출할 때 조금이라도 멋을 부리면 "그렇게 남자한테 관심받고 싶냐?"라고 타이르고, 멋을 안 부리면 "그래서 어떤 남자가 데리고 가겠어?"라고 잔소리하신 것도 기억한다. 옛 애인에게 "너는 여자가 되어서 치마도 안 입고 머리도 안 기르냐"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헤어졌다), 예전 직장에서 남자 상사에게 "00씨, 여자가 늙으면 난자도 늙어."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그만뒀다) 기억한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마다 이불을 덮어쓰고 우는 대신 나보다 먼저 그런 일을 겪은 사람들이 쓴 글을 읽거나 내가 겪은 일을 글로 남긴다는 것. 나의 일을 우리의 일로, 여성의 역사로 치환해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괴로운 이야기도 많지만, 괴로움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장면도 적지 않다. 동주는 결국 개명하고, 효경은 시어머니와 오로라를 보러 떠나며, 미스 김은 퇴사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복수한다. 이름 없이 어떤 작품의 작가, 가출한 남자의 딸, 현남의 여자친구, 주하의 엄마로만 등장한 인물들도 그들을 괴롭힌 악플러, 아버지, 현남, 가해자 모자(母子)로부터 끝내 등을 돌리며 자신의 삶을 되찾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오래전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손자를 지키기 위해 말 그대로 '칼을 빼고' 나섰던 동주의 언니 금주, 평생 가정 폭력 상담소에서 일하고 예순셋에 상담심리 석사과정을 시작한 주하의 할머니처럼 그 자체로 귀감이 되고 활력을 주는 여성 캐릭터들도 눈길을 끈다. 불법촬영 현장을 목격하고 증거를 남긴 자신을 도리어 가해자로 모는 가해자 모자에게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는 주하의 모습도 오래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다만 <첫사랑 2020>에서는 승민과 싸우고 나서 우는 서연에게 어른들을 대표해 사과하는 선생님 외에 그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다. 팬데믹과 이로 인해 더 벌어진 부모들의 경제력 차이 때문에 생애 첫 남자친구와 싸우고 헤어질 위기에 처한 서연이. 나도 학교 다닐 때 수업료가 비싼 학원에 다니고, 최신형 휴대폰을 가지고 있고, 비싼 요금제를 사용하는 아이들과 내 처지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낀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남자) 친구와 싸우거나 헤어질 마음을 먹은 적은 없다. 이는 그만큼 부모의 경제력 격차가 요즘 아이들의 일상생활 및 관계 맺기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뜻이 아닐까. 더 안타까운 건, 팬데믹이 발생하면서 예전보다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격차가 해소될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팬데믹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각자의 자리에서 깊고 긴 밤을 보내고 있는 나와 너는 결국 우리가 되어 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