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란 무엇인가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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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대표하는 문화비평가이자 문학평론가인 테리 이글턴의 책이다.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가 쓴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란 하나로 정의되기 힘든 다면적이고 복잡한 개념이기 때문에, 저자는 문화의 개념을 정의하는 대신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문화라는 주제를 소개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영국의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와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영국의 문인 T.S. 엘리엇과 레이먼드 윌리엄스, 오스카 와일드의 작업을 소개한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 중에 버크와 와일드가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챘을 터. 저자는 버크와 와일드 외에도 다수의 아일랜드계 영국인 명사들을 소개함으로써 식민지 출신으로서 본국에서 성공한 인물들의 보편적인 특징과,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문화의 특성을 짚는다. 


18세기 작가이자 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는 대표적인 보수주의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노예제에 반대했고 미국의 독립에 찬성했다. 저자는 그 이유를 버크의 출신에서 찾는다. 엄밀히 말해 영국은 버크의 모국이 아니었고, 아일랜드 출신인 버크에게 영국의 식민지 정책이 달가울 리 없었다. 이처럼 인간은 그 어떤 정치적, 군사적 상황 하에 있어도 자신이 실제로 '귀속'되어 있다고 여기는 문화적 배경으로부터 벗어난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이를 간파한 버크는 국가가 국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폭력이 아닌 관습, 전통, 풍습 등을 이용해야 하며, 이는 식민지 통치에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권력은 오직 감성을 통해서만 문화로 확장되어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에드먼드 버크처럼 아일랜드이고 후에 런던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저자는 와일드와 버크가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로 '소수자성'을 든다. 식민지에서 온 이들은 모국어를 버리고 본국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더욱 촘촘한 자의식을 가지게 된다. 모국의 문화를 버리고 본국의 문화를 배우는 과정에서 주변부에 위치해 중심을 관찰하는 훈련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중심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욱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을 기르게 된다. 와일드가 버크와 다른 점은 '예술을 위한 예술'에 탐닉했다는 것인데, 이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떤 경제적 목적이나 이윤적 동기가 없는 예술 활동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장 저항적이고 전복적인 행위가 아니겠는가. 반대로 생각하면 현대의 예술 활동에는 반드시 경제적 목적과 이윤적 동기가 결합되어 있으며, 이는 예술이 순수성을 잃고 자본에 잠식되었다는 방증이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문화를 망치는지 소개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문화산업'이라는 말은 언뜻 듣기에는 문화를 산업화해 문화 생산을 더욱 효율적으로 개선하고 문화의 영역을 더욱 넓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문화 영역에 있어서 문화가 아닌 산업의 비중이 확대되어 오히려 문화 고유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문화의 다양성, 다면성을 저해한다. 나아가 자본주의를 당연한 원리로 받아들인 현대인들은 성이나 피부색, 성정체성, 장애 등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일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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