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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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8개월 28일 밤. 무슨 뜻일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빨리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다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아도 제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그 작품, <천일야화>의 '천일야(千一夜)'다. 이야기는 1195년, 위대한 철학자 이븐루시드가 자기 고향에서 쫓겨나 작은 마을 루세나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시작된다. 의술을 펼치며 근근이 살아가던 이븐루시드는 두니아라는 이름의 소녀를 만나고 곧이어 사랑에 빠진다. 동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두니아는 잠자리에 든 이븐루시드에게 "이야기 하나만 해줘요."라고 졸랐다. 


그때부터 이븐루시드는 두니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야기를 할수록 둘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한다. 이븐루시드는 철학자답게 이성, 논리, 과학 등을 중시했다. 반면 마족(魔族) 출신인 두니아는 이성이나 논리,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힘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 두니아가 지닌 마족으로서의 본성 때문일까, 아니면 믿음 때문일까. 두니아는 이븐루시드와 함께 보낸 천 일하고도 하룻밤 동안 세 번이나 수태해 최대 열아홉 명으로 짐작되는 아이를 낳았고, 가뜩이나 가난한 이븐루시드는 이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보다 몇 배의 노동을 해야 했다. 생활고에 지친 그들은 결국 헤어졌고, 두니아는 마족 세계로 돌아갔다. 


팔백 년 이상이 흐른 후, 거대한 폭풍우가 뉴욕을 강타해 인간세계와 마족 세계를 잇는 통로가 뚫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일을 계기로 정원사 제로니모는 항상 지면에서 9센티미터 이상 떠 있는, 공중부양 상태의 몸이 된다. 제로니모가 자신의 후손임을 확인한 두니아는 제로니모에게서 오래전 사랑했던 이븐루시드의 얼굴을 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로니모를 구하기로 한다. 제로니모 역시 두니아에게서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던 마족의 본성을 깨워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마족의 본성은 또 다른 불안과 갈등을 나을 뿐이고, 결국 제로니모는 해결의 실마리는 마성이 아니라 이성임을 깨닫는다. 


<천일야화>로 시작해 <어벤저스>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니. 이런 이야기는 본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다. 어쩌면 허무맹랑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이야기가 묘하게 납득되는 건, 이야기의 기저에 깔려 있는 '이성 대 비(非) 이성'에 관한 논의 때문이다. 철학자 이븐루시드로 대표되는 이성과 가잘리, 흑마족으로 대표되는 비이성 사이의 대립. 그 사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건, 이성을 사랑한 마족 여왕 두니아와 마성을 타고났지만 이성을 택하는 인간 제로니모다. 작가는 인간을 괴롭히고 유린하는 흑마족을 통해 이성에 반하는 가치관이나 통념이 인간을 얼마나 괴롭게 만드는지 폭로한다. 이 같은 통찰은 종교(이슬람교)로 인해 긴 시간 고통받은 작가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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