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 (리커버 에디션) 옥타비아 버틀러 리커버 컬렉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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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다. 이는 인종 문제에 있어서도, 젠더 문제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미국을 대표하는 SF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1976년에 발표한 소설 <킨>은 현대의 흑인 여성 다나가 알 수 없는 이유로 1815년 미국 메릴랜드 주의 노예 농장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시간 여행을 하기 전까지 다나는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큰 차별을 겪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직업 제한과 임금 차별이 존재하지만, 현대에는 흑인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노력하면 직업을 가질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으므로 옛날에 비하면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다나는 자신이 흑인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을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백인 남자 친구 케빈은 그런 다나를 이해하는 척 달래면서도, 다나의 개성을 무시하고 다나가 흑인 여성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하는 발언을 해 다나를 화나게 만든다. 


내가 이상한 걸까, 세상이 이상한 걸까. 혼란스러워하던 다나에게 일어난 시간 여행이라는 사건은, 다나가 처한 불합리한 상황을 훨씬 더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도와준다. 1815년 미국 메릴랜드 주에는 여전히 노예 제도가 존재하고 백인에 의한 흑인 차별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미래에서 온 다나는(물론 그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지는 않지만) 어느 누구의 노예도 아니지만 피부색 때문에 노예 취급을 당하고 무보수 노동을 착취당한다. 같은 노예라도 여성은 백인 남성 주인의 '재산'이 될 노예를 생산(출산)할 의무를 지고 원하지 않는 남성과 성교를 강요받거나 강간을 당한다. 


시간 여행을 통해 다나는 노예 제도가 있었던 시절이나 없어진 시절이나 흑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 물론 19세기에 비하면 20세기의 흑인들이 전보다 훨씬 나은 사회적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변화는 차별을 인식하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세기에도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 차별 역시 그러한 차별을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완전히 철폐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도 마찬가지다.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당연시하는 인간은 결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우연히 이 시간 여행에 휘말려 19세기 미국 노예 제도의 실상을 두 눈으로 보게 된 케빈은 더 이상 흑인의 삶, 여성의 삶에 대해 함부로 입 열지 않는다. 자신이 아무리 흑인 여성의 삶에 대해 잘 알고 이해한다 한들, 백인 남성으로서 존재하는 한 인식과 경험의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다나는 케빈을 자신과 남은 삶을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서 받아들인다. 알 수 없으므로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 알지 못하겠지만 알고 싶다는 마음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던 인종의 벽, 젠더의 벽을 무너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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