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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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님은 군상극을 참 잘 쓰시는 것 같다. <피프티 피플>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등장인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야기를 더욱 재미있게 엮으시는 것 같다. <시선으로부터>의 경우 주인공 심시선의 가계도에 등장하는 인물만 스무 명이다. 여기에 각 인물이 다양한 사연으로 만나게 되는 인물들을 더하면 서른 명은 족히 이 소설에 나오지 않을까 싶다(세어보지 않아서 정확하지는 않다). 


이야기는 심시선이라는 여성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후손들이 하와이에서 제사를 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된다. 심시선이 타계한 지 10년 만에 첫 제사를 하는 이유는 심시선이 제사를 비롯한 일체의 유교적 허례허식을 거부했기 때문이고, 다른 곳도 아닌 하와이에서 제사를 하는 이유는 심시선이 젊을 때 '사진 신부'로 하와이에 팔려갔기 때문이다. 심시선의 후손 열네 명은 각자의 이유로 제사에 참가해 각자의 방식으로 제사를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후손들은 서로에게 품었던 해묵은 오해나 갈등을 해소하기도 하고,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었던 고민을 풀 열쇠를 스스로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제사라면 나도 찬성이다!) 


원래 주인공의 사'후'에 일어난 일을 그린 소설이기도 하지만, 심시선이 죽기 전에 경험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대략적으로 추측 가능한 정도로만 서술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시퀄'에 해당하는 작품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더욱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과감히 생략한 것일 수도 있지만, 심시선과 민애방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 자세히 나오지 않은 건 아쉬웠다. 이 소설에서 최대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마티아스 마우어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민애방인데 이렇게 적게 서술되다니(ㅠㅠ). 작가님이 다른 작품에서 더 길게 이야기를 푸시려고 일부러 이만큼만 이야기를 들려주신 건 아닐까 하고 기대를 섞어 짐작해본다. 


이 소설은 챕터의 시작 부분에 심시선이 생전에 발표한 책이나 글, 인터뷰 기사 등의 일부가 일종의 발췌문처럼 삽입되어 있다. 심시선이 허구의 인물이므로 심시선과 관련된 글 모두 허구이지만, 이 모든 글이 실제로 존재하는(혹은 존재했던) 작가의 글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용이 무척 좋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심시선처럼 타계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가 쓴 글이 널리 읽히고 여러 사람에게 회자되는 여성 작가가 (적어도 남성 작가만큼은) 많아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그리고 나로선) 심시선과 비슷한 입지를 가진 여성 작가로 떠오르는 이름이 많지 않다(박완서, 박경리 정도). 더 많은 '시선'이 필요하다.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269쪽)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289쪽) 


"나의 계보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그것이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 만약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가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가를 이루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고 싶었다." (작가의 말, 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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