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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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쪽을 넘지 않는 얇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나서 아쉽지 않다고 느낀 건, 저자가 무라카미 하루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야기는 저자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 한 마리를 집 근처 해변에 버리러 간 일화로 시작한다. 이때의 기억을 시작으로 아버지와의 추억을 하나씩 하나씩 떠올린 저자는 오랫동안 하기 싫은 숙제처럼 미뤄왔던 아버지의 이력 하나를 조사하러 나선다. 그것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으로 파병되었던 아버지가 난징 함락(난징대학살) 때 제일 먼저 공격한 것으로 알려지며 피비린내 나는 평판을 얻은 보병 제20연대 소속이었던 것이 맞는지다.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전까지 저자는 아버지가 대체로 무탈하고 온화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애에는 아들인 저자가 겪지 않은 전쟁이란 사건이 있었다. 승려의 아들인 아버지는 벌레 한 마리조차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고 배우며 자랐다. 그런 사람이 느닷없이 전쟁터로 끌려가 눈앞에서 사람들이 떼죽음 당하는 걸 봤다. 전쟁이 아무리 참혹해도 참혹하다고 글을 쓰면 불온하다고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 저자처럼 글을 썼던 아버지에겐 참으로 답답하고 우울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전쟁 경험에 관해 알게 된 저자는 아버지와 함께 살 때 이따금 아버지가 보였던 표정이나 행동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더 좋은 학교에 들어가길 바랐던 것도, 남들이 인정하는 직장에 들어가 안정된 삶을 살길 바란 것도, 당시에는 저자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부당한 처사로 느껴졌지만, 이제는 아버지 자신이 그런 삶을 원해도 살기 힘든 시대를 살았기 때문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를 깨달았을 때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해드려라'라는 교훈을 주면서 끝이 날 것 같지만, 저자는 그렇게 이 글을 마무리하지 않는다. 만약 아버지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저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지 않았거나, 전쟁에서 다른 진로를 찾았거나, 전쟁 후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했거나 해도 역시 저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한 결과로 생겨난 존재이기 때문이다(이는 저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의식의 안쪽에서 또는 무의식의 안쪽에서, 온기를 지니고 살아있는 피가 되어 흐르다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쓰인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97쪽) 


고양이를 버리러 간 작은 일화에서 출발해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로 사유를 확장한 솜씨가 놀랍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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