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 삶의 지도를 확장하는 배움의 기록
이길보라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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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해야 했던 차별과 혐오의 경험이 더 이상 감내하기 힘든 수준임을 느끼던 때였다. 다른 나라에 가도 그곳에는 그곳 나름의 혐오와 차별이 있고, 나와 비슷한 현실 인식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여성들을 알게 된 후로는 마음을 접었지만, 지금도 가끔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곳이 네덜란드이면 어떨까. 이길보라의 책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를 읽고 든 생각이다. 


코다(CODA,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자녀)인 저자는 어릴 때부터 농사회와 청사회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할 때가 많았다.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아시아 8개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밖 공동체에서 글쓰기, 영상 제작 등을 배웠다.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방송영상과에 진학했고, 농인 부모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담은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만들어 많은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가던 저자가 돌연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났다. 계기는 사소했다. 2016년, 프로젝트 차 유럽에 방문해 여러 나라를 여행하던 중 네덜란드로 향했다. 암스테르담을 구경하다가 네덜란드 필름아카데미라는 곳에 들렀는데, 학교를 소개해 주겠다고 나온 사람이 알고 보니 이 학교의 학장이었다. 그저 조용히 학교를 둘러보고 싶었을 뿐인데, 한국에서 영화를 전공했고 직접 영화를 제작한 경험도 있다고 말했더니 일종의 '입학 상담' 겸 '사전 입시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불쾌하기는커녕 마음이 설레고 벅찼다. 여기서 공부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저자의 유학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진진해진다. 한국에서는 학풍이 자유롭다는 평가를 받는 학교를 나와 진보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았는데, 네덜란드에 가보니 자신은 여지없는 '유교걸'이었다. 학장이 손수 커피를 타주고 심지어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라고 하다니.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덜란드에선 누가 무엇을 입든 어떻게 다니든 신경 쓰지 않았다. 한국에선 어제 입었던 옷을 또 입으면 이상한 말을 듣는데, 네덜란드에선 매일 다른 옷을 입는다고 패셔니스타 소리를 들었다. 여자가 브래지어를 안 하든, 남자가 네일 아트를 하든 뭐라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발표라면 자신 있었다. 부모가 농인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관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흥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선 부모가 농인이라고 말해도 "그래서 뭐?"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농인과 청인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서 8개월간 여행을 했다고 할 때도, 일본인 남자친구와 결혼하지 않고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때도, 한국인들은 대체로 놀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네덜란드에선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 한국에선 언제쯤 이런 일이 가능할까. '다른 세상'을 체험하고 돌아온 저자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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