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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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길고 낯선 이름들과 복잡한 가계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남성은 여성보다 더 대접받고 덜 처벌당하는 게 싫었다. 제우스는 누가 봐도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교접하는 난봉꾼인데 그의 아내 헤라는 왜 정당하게 화를 내고도 질투의 화신 소리를 듣는지, 둘 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스캔들 메이커인데 왜 제우스는 신들의 왕이고 아프로디테는 음란한 여신 소리를 듣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불만을 허구인 신화에 대고 푼다고 말하면 할 말 없지만. 


매들린 밀러의 장편소설 <키르케>도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미국 브라운대학교에서 고전학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그리스 고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첫 번째 결과물이 2012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아킬레우스의 노래>이고 두 번째 결과물이 <키르케>이다. 저자는 '키르케'가 서양 문학에서 처음 등장한 마녀라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마녀란 문자 그대로 악마처럼 사악한 힘을 가진 여자가 아니라, 사회가 여자에게 혀용한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여성을 부르는 말이다. 저자는 서양 문학 최초의 마녀인 키르케를 통해 남성 영웅들이 당연하게 가지고 있는 능력을 여성에게도 부여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키르케는 티탄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장녀다. 키르케는 성장하는 내내 자신은 아버지처럼 능력이 출중하지도 않고, 어머니처럼 매력적이지도 않고, 동생들처럼 남다른 개성이 있지도 않은, 그저 평범하고 못생기고 멍청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키르케는 한 인간에게 연정을 품게 되고, 그 인간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키르케가 지닌 능력이 인간은 물론 신들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엄청난 것임이 알려지면서, 위협을 느낀 제우스와 키르케의 아버지 헬리오스가 합의해 키르케를 외딴섬으로 귀양 보낸다. 하지만 이로 인해 키르케의 능력이 사그라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져서 미노타우로스, 다이달로스, 아폴론, 헤르메스, 오디세우스 등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과 대단한 일들을 벌이게 된다. 


<키르케>는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한 소설인 동시에 한 여성의 각성과 성장을 그린 뛰어난 여성 서사 작품이다. 키르케는 가스라이팅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냈다. 키르케의 부모는 아들과 딸을 차별했고, 키르케의 동생들은 키르케를 조롱하고 무시했다. 키르케가 좋아한 남자들은 하나같이 키르케를 이용한 후 키르케를 버렸다. 그때마다 키르케는 상심하고 좌절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의 새로운 능력을 갖추며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간다. 유배를 당하면 유배지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사랑이 떠나면 이제 더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단념하는 대신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결국 키르케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사랑받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 주도적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 이런 그리스 신화라면 얼마든지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는 님프도 대체로 별 쓸모가 없는데 못생긴 님프는 아무것도 아니지. (...) 하지만 괴물은 항상 자기 자리가 있잖아. 그녀는 이제 그 이빨로 모든 영광을 낚아챌 수 있어. 그 덕분에 사랑을 받을 일은 없겠지만 구속당할 일도 없지. (95쪽) 


여태껏 나는 실이 없는 직녀, 바다가 없는 배였다. 그런데 보라, 이제는 어딜 항해하고 있는지. (108쪽) 


나는 아버지의 힘을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다고 세뇌당하며 자랐다. 하지만 이제 물을 건드리며 중얼거려보았다. 보여줘.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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