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봄 - 상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7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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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장편소설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세계는 크게 <모방범>, <화차>, <솔로몬의 위증> 같은 현대물과 <외딴 집>, <흑백>, <안주> 같은 시대물로 나뉘는데, <세상의 봄>은 후자에 속한다.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친숙한 현대물이 아닌 게 의아했는데, 죽기 전까지 에도 시대가 배경인 괴담으로 '백물어(百物語)'를 완성하고 싶다는 작가의 계획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수긍할 수 있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에도 시대 기타간토의 작은 번 기타미.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다키의 집에 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찾아온다. 여인은 성에서 변사가 일어나 죽을 위기에 처했다며, 토목청 감독인 가가미 가즈에몬(다키의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가면 괜찮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튿날 여인은 아기를 데리고 떠나고, 다키와 다키의 아버지는 성에서 일어난 변사가 자신들의 생활을 크게 바꿀 것을 예감한다. 

얼마 후 다키는 사촌인 한주로의 손에 이끌려 고코인으로 간다. 고코인은 유폐된 청년 번주 시게오키가 요양을 이유로 머무르고 있는 별저다. 고코인을 관리하는 이시노는 다키의 어머니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신묘한 능력이 다키에게도 전해졌을지 모른다며, 그 능력을 이용해 시게오키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다. 알고 보니 시게오키는 때로는 천진한 소년으로, 때로는 요염한 여인으로, 때로는 흉포한 사내로 변하는 - 소위 말하는 '다중인격자'였다. 

시게오키의 치료를 위해 모인 사람들은 시게오키의 증세를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시게오키가 '과거에 저지른 일' 때문에 원혼이 씐 것이라고 한다. 서양의학(난학)을 접한 의사는 원혼 같은 건 없으며, 이 또한 신체적 병의 일종이라고 한다. 다키는 입장을 정하지 못하다가, 치료가 계속되고 시게오키의 여러 인격들이 모습을 드러낸 후에야 입장을 정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시게오키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게오키가 과거에 '저지른 일' 때문이 아니라 과거에 '당한 일' 때문이라는 것을. 

(여기서부터 스포 있음) 

시게오키는 어릴 때 가까운 친족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다른 인격을 사용해 원래의 인격을 지키고, 여러 인격을 내세워 자기 나름대로 사건의 진실을 간직해온 것이다. 친족 간 성폭행은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에서는 피해자가 남성이다. 성폭행 피해자인 여성을 남성이 '구원'하는 서사는 많이 봤지만 반대인 경우는 못 봤기에 신선했다. 

시게오키를 성폭행한 가해자가 다름 아닌 자신들이 오랫동안 존경해온 인물임을 알게 되었을 때, 주변 인물들이 이를 부정하거나 은폐하려 들지 않고 피해자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피해자를 도와주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현실에선 이 같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주변 인물들이 가해자를 옹호하며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퍼붓는 경우가 더 많다. 과연 피해자가 여성이었다면 소설 속 주변 인물들이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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