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 폭력의 시대를 넘는 페미니즘의 응답
권김현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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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생이 생각하는 페미니즘과 90년대, 2000년대생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한다. 80년대생인 나는 자라면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여고 시절에 여대 출신 선생님이 어떤 동화책을 보여주셨는데 나중에야 그 책이 '페미니즘 동화'로 불리는 <종이 봉투 공주>라는 사실을 알았고, 여대에 입학한 후에는 여성학 수업도 듣고 페미니즘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읽었지만 지금처럼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페미니즘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데, 그에 비하면 요즘의 10대, 20대 여성들은 페미니즘에 관한 대화도 많이 하고 인식도 훨씬 깊은 것 같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의 책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는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리부트'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급기야 '페미니즘의 대중화'라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 현상에 대해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에는 모두 아홉 편의 글이 실려 있으며, 각각의 글은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 미투운동, N번방 사건 등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들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와 그것이 페미니즘 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다각도로 설명한다.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 N번방 사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사건에 가담한 주체도 다르고 구체적인 실행 방식이나 사건의 진행 양상도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남성 간의 연대와 협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을 이용하고 착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성지배를 유지하는 핵심에는 이성애 중심주의가 있고, 이성애 중심주의는 동성애혐오와 여성혐오를 동력으로 삼는다. 남성들은 남성들 간의 동성사회를 유지하면서도 동성애로 빠지지 않기 위해(이는 '성애적 사랑과 성애적이지 않은 사랑'을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여성을 수단으로 이용한다. 이때 여성은 여성 자신이 아니라 남성과 맺는 관계 또는 남성들 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역할로만 존재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여성혐오의 본질이다. 


여성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훨씬 높은 빈도로 딸이나 어머니, 할머니 같은 가족 관계의 호칭으로 불린다('위안부 할머니'가 대표적이다). 이는 가족 관계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으면 여성의 지위나 역할을 상상할 수 없는 (남성들의) 능력 부재 또는 훈련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여성 본인이 남성의 관점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남성이 여성의 관점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모습만큼 꼴사납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여성이 많지 않았지만 요새는 다르다. 이 책에 따르면, 2020년 <코스모폴리탄>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곤 한다"라는 질문에 57.6퍼센트의 여성이 '그렇다'라고 답했다. "아니다"라고 답한 42.4퍼센트의 여성 중에도 '자신이 없어서', '잘 몰라서'. '남녀평등이라는 말이 더 나아서'라고 답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가히 '페미니즘 대중화 시대'라고 명명할 만하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대중화된 속도가 빠를수록 백래시도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 벌어지는 다종다양한 논쟁들이 언제 어떻게 분열의 촉매제로 작용될지 모른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스트 한 사람 한 사람이 더욱 꾸준히 공부하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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