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은희경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은희경 작가의 <빛의 과거>를 읽었다. 부끄럽게도 은희경 작가의 책을 읽은 건 그 책이 처음이었는데, 밤잠을 잊을 만큼 재미있었다. 그래서 은희경 작가의 작품을 전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은희경 작가가 2007년에 발표한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의 리마스터판이 출간되었기에 읽어봤다. 2007년이면 내가 대학교 3학년이었을 때이고, 그때도 책을 읽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진지하게 읽지는 않았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애독서였던(ㅎㅎ) 그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13년이나 늦게 만났지만 지금이야말로 이 책을 만나기에 최적이라는 생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만큼 이 책에 담긴 작가의 시선이나 태도가 세련되고 앞서있기 때문이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표제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이다. 중학생이 될 예정인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고급 이태리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된다. 식사를 하는 내내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등 뒤에 있는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을 본다. 그림의 제목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인지도 모른 채 그림을 보았던 '나'는 왠지 모르게 서글픈 기분을 느낀다. 이후 '나'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 대한 강박적인 애착을 보이는데, 당시에는 이러한 애착이 아름다움을 뽐내는 비너스의 모습과 자신의 뚱뚱한 몸의 대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다이어트로 살을 많이 뺀 후에도 '나'는 여전히 지독한 결핍과 열등감을 느낀다. 애초에 '나'가 가진 결핍과 열등감의 근원은 비너스의 아름다운 몸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축복받지 못한 출생에서 비롯된 아버지의 무관심인 까닭이다.


이어지는 <날씨와 생활>도 흥미롭다. '소녀 B'는 곧잘 몽상에 빠진다. 가족들은 '소녀 B'에게 무관심하고 전학 간 학교에는 친구 한 명 없으니, 몽상만이 '소녀 B'의 유일한 휴식이자 구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 B'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학교로 찾아온 남자의 정체는 '소녀 B'의 어머니가 얼마 전에 구입한 소년소녀 세계명작 전집의 대금을 받으러 온 수금원이다. 남자의 정체를 알기 전에는 자신에게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일이 벌어진 줄 알고 설레기도 했지만, 정체를 알고 난 후에는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울 뿐이다. 몽상이 근사하고 아름다울수록 현실이 더 비참하고 암울하게 느껴지는데, 그러한 몽상을 하지 않고서는 비참하고 암울한 현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지도 중독>, <고독의 발견>,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의심을 찬양함>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믿고 읽는)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 또한 훌륭하다. 작가 후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소설 한편을 쓰고 나면 이로써 또 한 번 한국문학을 빛내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텐데(?) 다만 가까스로 한 가지의 고독을 이겨냈다는 느낌이 든다." (295쪽). 리마스터판을 내면서 새로 쓴 작가의 말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여전히 고독을 발견하며 의심을 찬양한다. 그것이 소설이라는, 여전한 나의 날씨이다." 고독을 '이겨내고' '발견하며' 쓰는 작가라서, 13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새것처럼 빛을 발하는 작품을 쓸 수 있는 걸까. 너무 멋있고, 앞으로 계속 더 읽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