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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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매기스 플랜>의 원작자 캐런 리날디의 책을 읽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행복해지고 싶다면 잘하는 일만 하지 말고 못하는 일에 도전하라고 했다. 잘하는 일만 하고 싶어 하는 건 조금의 실패도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주의 때문이므로, 완벽주의를 버리려면 일부러라도 못하는 일에 도전하면서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많지 않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는데, 나야말로 잘하는 일만 하고 싶어 하는 완벽주의자의 전형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그동안 읽지 않았던 장르나 취향이 아니라고 여겼던 작가의 책을 읽고 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책도 그중 하나다. 사실 2018년 10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다른 책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의 나는 그 책이 지나치게 난해하고 장황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책은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신간이 나오자마자 읽은 건, 그때의 생각이 틀렸을지 모른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읽어보니 여전히 난해하고 장황하지만, 그만큼 작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고, 작가가 보는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는 총 다섯 편의 글이 실려 있다. 1993년 저자의 고향인 일리노이주에서 열리는 축재를 취재하고 쓴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를 비롯해 미국의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촬영 현장을 방문하고 쓴 <데이비드 린치, 정신머리를 유지하다>, 미국의 작가 존 업다이크의 소설 <시간의 종말을 향하여>를 읽고 쓴 <무엇의 종말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종말인 것만은 분명한>, 수학에 관한 두 권의 장르 소설을 읽고 쓴 <수사학과 수학 멜로드라마>,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선집의 서문으로 쓴 <결정자가 된다는 것> 등이다.


이 중에 가장 좋았던 글은 <시간의 종말을 향하여>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미국의 국민 작가 반열에 오른 존 업다이크의 소설에 대해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평가가 극명하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모 세대는 존 업다이크의 소설이 가식적이지 않고 솔직하다고 열광한 반면, 자식 세대는 냉소적이고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 저자는 이러한 차이가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특성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본다. 정상 가족 신화가 건재하던 시대에 성장기를 보낸 부모 세대에게는 불륜이나 이혼 같은 주제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윗세대에 대한 반발이자 '쿨한' 행동으로 보인 반면, 정상 가족 신화가 해체되는 와중에 성장기를 보내고 있는 자식 세대는 불륜이나 이혼 같은 주제가 자신들의 안정과 생존을 위협하는, 결코 '쿨하지 못한' 행동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필리베르트 스호흐트의 <천재와 광기>,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의 <그가 미친 단 하나의 문제, 골드바흐의 추측>을 읽고 두 작품을 비교해 쓴 서평도 인상적이었다. 이 글에서 저자는 고등수학에 대해 많은 지식이나 경험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일반 독자들이 이런 작품들에 열광하는 현상이 재미있다면서, 독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고등수학 자체가 아니라 '고등수학을 연구하는 기분'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수학적 용어나 개념들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이 밖에도 평소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평소 생각해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생각해보게 만드는 글이 여럿 실려 있다. 마냥 쉽지만은 않은, 그만큼 읽는 보람이 있는 에세이를 찾는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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