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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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 <절규>를 비롯해 내가 아는 뭉크의 작품 대부분이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이다 보니 뭉크의 생애도 당연히 어둡고 우울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작가가 뭉크의 생애를 따라서 뭉크가 살았던 장소들을 여행한 책 <뭉크>를 읽으니 내 짐작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뭉크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열세 살 때 누이 소피마저 숨졌다. 아버지는 하나 남은 자식인 뭉크에게 엄격한 종교적 생활 방식을 강요했다. 그림에 몰두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고, 화가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지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뭉크는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이십대에 본격적으로 화가로서 경력을 쌓게 되었다. 이때만 해도 뭉크의 작품에는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파리 유학 시기에 그린 <칼 요한 거리의 봄날>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다.


뭉크의 작품은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극명하게 달라진다. 20대를 보내는 동안 뭉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었던 공포와 불안, 신경 쇠약, 현기증, 환영 등이 폭발하기라도 하듯이 작품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칼 요한 거리의 저녁>이다. 먼저 그린 <칼 요한 거리의 봄날>과 같은 배경인데, 거리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이 전부 유령 같아 보인다. <절규>에 나오는 인물처럼 말이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뭉크가 남긴 이 말은 뭉크의 예술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문구이다. 한때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받아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고자 했던 뭉크는 점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그리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절규>가 그렇다. 나는 이제까지 <절규>에서 절규하는 주체는 그림 중앙에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뭉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절규>에서 절규하는 주체는 인물이 아니라 인물 주변에 있는 자연이다. 그림 중앙에 있는 인물은 자연의 절규를 듣고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 실제로 절규를 했을 리는 없다. 뭉크 자신이 그렇게 '본' 것이다.


뭉크가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던 데에는 사연이 있다. 뭉크는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정서가 불안했다. 여러 여인과 사귀었으나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여기에 다른 화가들과의 경쟁, 정치적 갈등, 전쟁 같은 악조건이 더해지면서 뭉크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뭉크는 이러한 내면의 갈등과 외면의 고비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그것들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는 편을 택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뭉크의 작품에 열광했고, 뭉크는 살아 있는 동안 남부럽지 않은 부와 명예를 누린 몇 안 되는 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50대에 산 집에서 30년을 혼자 살다 죽은 그가 정말로 행복했을까. 이제는 뭉크의 작품을 접할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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