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나의 자서전 - 김혜진 소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4
김혜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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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의 소설은 읽을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진다. 신작 <불과 나의 자서전>도 그랬다. 남일동 출신인 '나'는 아버지가 경매에 나온 집을 구입해 겨우 중앙동으로 이사간다. 나의 부모는 남일동 출신임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듯 남일동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만, 퇴사 후 달리 할 일이 없는 나는 틈만 나면 남일동으로 향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남일동에 있는 약국에서 우연히 남일동으로 갓 이사 온 싱글맘 주해와 그의 딸 수아를 만난다. 혼자 힘으로 어린 딸을 키우느라 바쁜 주해를 보다 못한 나는 주해가 일하는 시간에 수아를 돌보게 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나에게 주해는 여태껏 보지 못한 유형의 인간이다. 나의 부모는 경매에 부쳐진 이웃의 집을 사서라도 자신들의 처지를 바꾸려고 하는 인간들이고, 나의 예전 이웃들을 그런 나의 부모를 손가락질하면서도 자신들의 처지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 인간들이다. 그런데 주해는 남일동에 사는 처지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현실에 안주하지도 않는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스스로 발품을 팔아서라도 고치려고 노력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현실을 바꿔보려고 애쓴다. 나의 부모는 그런 주해가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욕하고, 이웃들은 그런 주해를 의심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어느 누구도 주해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


주해에게 나는 어떤 인간으로 보였을까. 나는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직원을 변호하다 자기도 따돌림당하는 신세가 되어 퇴사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만큼 정의롭지도 않고 순순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만큼은 성숙하지만, 불의에 맞서고 순종하길 거부할 만큼 용감하지는 못하다. 나는 주해를 볼 때마다 자신의 결점을 의식하고, 주해 역시 남일동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나로부터 완전한 이해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안다. 모르는 사람의 비난보다 아는 사람의 배신이 가슴에 더 사무치는 법이다.


<불과 나의 자서전>을 읽는 동안 여러 대목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남의 불행을 보고도 눈 돌렸던 때가 생각나서 부끄러웠고, 불의인 줄 알면서도 눈 감았던 때가 생각나서 부끄러웠다. 의로운 사람이 스스로를 희생해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도 감사하지 않았던 때가 생각나서 부끄러웠고, 오히려 그런 사람을 오해하고 그러한 오해를 합리화했던 때가 생각나서 부끄러웠다. 편한 길을 가기는 쉽고, 불편한 길을 가기는 어렵다. 불편하게, 어렵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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