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프루트 정글 큐큐클래식 3
리타 메이 브라운 지음, 알.알 옮김 / 큐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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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작가들의 책을 읽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스콧 피츠제럴드나 레이먼드 카버의 책을 읽던 시간에 리타 메이 브라운의 <루비프루트 정글>을 읽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는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디에 있었을까. "읽은 즉시 각인되어 남은 인생 내내 짊어질 수밖에 없는 책"이라는, 책 띠지에 적힌 듀나 님의 한줄평만큼 이 책의 가치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장은 없을 듯하다.


몰리 볼트는 펜실베이니아의 보수적인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몰리는 어려서부터 활달하고 머리가 좋아서 틈만 나면 장난을 쳤다. 그 바람에 어머니로부터 야단을 맞은 적도 많지만, 몰리는 어머니가 야단을 치거나 말거나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자기답게 살아간다. 머리가 좋으니 학교 공부도 잘했는데, 어머니는 여자가 공부를 잘해봤자 무슨 소용이냐며 타박한다. 몰리가 아무리 학교에서 인기가 많고 선생님들의 칭찬을 들어도, 전근대적인 성 편견을 지닌 어머니의 눈에는 몰리가 그저 '여자답지 못한' 천방지축, 말괄량이로 보일 뿐이다.


몰리는 똑똑한 아이답게 일찍부터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자각한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고, 여자에게 더 끌린다는 것을 말이다. 몰리는 펜실베이니아에서, 플로리다에서, 뉴욕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시에 여러 명의 여자들을 만나고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경험한다. 몰리는 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최선을 다해 상대를 사랑하지만, 정작 상대 여성들은 여성 또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혹은 그러한 편견을 가진 주변 사람들 때문에 몰리를 놓친다. 그로 인해 몰리는 의도치 않게 인생의 크고 작은 부침을 겪으면서도 천천히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이미 여성인 여성들에게 '여성답지 못하다'며 억압과 통제를 일삼는 사람들 중에는 놀랍게도 많은 수의 여성들이 있다. 자기 안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욕망을 따름으로써 발생하는 손해보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사회의 관습을 따름으로써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해 놓고서는, 정작 그 판단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거나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괴롭히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일부 이성애자들이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심리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제야 하는 생각들을 1944년생인 저자가 이미 했다는 것과, 내가 지금에서야 깨닫고 있는 문제들이 1973년에 발표된 이 작품 안에 모두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성과 성소수자와 페미니스트가 인식하는 현실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 참담하다. 세상이 바뀌려면 얼마나 더 많은 '루비프루트'들의 목소리가 더 보태져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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