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붕대 감기 ㅣ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평점 :

윤이형 작가의 <작은마음동호회>에 이어 <붕대 감기>를 읽었다. 약 4개월의 간격을 두고 출간된 책이라서 그런지 문제의식이 비슷하고 인물 설정도 일부 겹친다. 눈에 띄는 차이는 <작은마음동호회>에 실린 소설들은 따로 떨어져 있는 단편인 반면, <붕대 감기>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궤로 연결된 중편(혹은 장편)이라는 것이다. 이 차이는 작지만 결정적이며 <붕대 감기>의 결말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모두 따로 떨어져 있고 서로 별 상관없는 존재들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이야기는 한 미용실에서 시작된다. 미용실에서 실장으로 일하는 해미는 8개월 전에 아이와 함께 와서 마지막으로 염색을 하고 간 손님 하나가 계속 마음에 걸린다. 모발 상태가 안 좋고 관리를 제대로 안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다른 손님들처럼 미용사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해미의 눈에는 어렵게만 보이는 책들을 읽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아니꼬웠던 까닭이다.
영화 홍보사에서 일하는 은정은 아들 서균 때문에 미쳐버릴 것만 같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들을 잠시 시부모 댁에 맡겼는데, 시부모가 다니는 교회 형들, 누나들과 눈썰매를 타러 갔다가 원인 모를 병을 얻어 입원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은정은 서균이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을까 봐 불안하고, 남편과 시부모가 워킹맘인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아서 두렵다. 이런 마음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지만, 그동안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친구를 사귈 여유가 없었던 은정에겐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
미용사로 일하는 해미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직업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페미니즘을 만난 이후로 여성 손님들에게 최신 유행 스타일의 파마와 염색, 헤어매니큐어 등을 권하는 것이 코르셋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성 손님이 남자친구를 데려와 머리를 단발로 자를지 말지 '허락'을 구하는 모습을 볼 때면 반감마저 느낀다. 참다못한 해미는 직장 상사인 실장 해미에게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들 외에도 여러 여성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이야기가 서로 풀어지고 엮이면서 소설이 전개된다.
제목인 <붕대 감기>는 은정의 아들 서균과 친구인 율아의 엄마 진경과, 진경의 고등학교 친구 세연의 일화와 관련이 있다. 진경과 세연은 고등학교 시절 교련 시간에 서로의 머리에 붕대 감는 연습을 하면서 친구가 되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 절친했던 두 사람은 진경이 결혼을 하고 세연이 비혼을 택하면서 조금씩 멀어졌다. 우연히 연락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세연의 눈에는 '남자 없이 못 사는' 진경이 한심해 보이고, 진경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세연이 부담스럽다.
한국에서 비혼으로 살고 있는 30대 여성으로서, 이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 대부분이 실제로 내가 알고 지내는 여성들처럼 보였고, 그중 몇몇은 나 자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특히 세연이 진경을 보면서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은, 내가 결혼한 친구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상당히 비슷하다. 고교,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나와 관심사가 비슷하고 생각도 닮아 있었던 친구들이,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고 전혀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고 느낄 때의 기분이란. 그들을 비난할 순 없지만 공감할 수도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작가는 여성들 간에 존재하는 대립과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 언젠가 서로에게 호감을 품고 가까워지려고 했던 시절을 기억하면서 다시 서로를 이해해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걸로 될까.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로를 '너무' 사랑하고 '너무' 미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회의 주류인 이성애자 남성들은 이렇게까지 서로를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감정은 배제하고 결과만 챙긴다. 여성들도 그래야 한다. 고용 차별 철폐, 임금 차별 철폐, 생활동반자법 제정 같은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것이 여성들에게 더 시급한 문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비혼/기혼 같은 구분이야말로 "해일이 몰려오는 데 조개나 줍고 있는 격"이다. 어쩌면 작가 역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