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1
쓰루타니 가오리 지음, 현승희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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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는 같은 만화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사회인이 된 지금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 앞에서 만화를 좋아한다는 말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기 보다는, 상대방이 알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입을 다물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렇게 누구에게도 나의 취미를 알리지 않고, 누구와도 취향을 공유하지 않은 채 나이를 먹어갔을 나에게 어쩌면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안겨주는 만화를 만났다. 2019년 <이 만화가 대단하다!> 여성만화 부문 1위에 빛나는 쓰루타니 가오리의 만화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이다.


유키 할머니는 3년 전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자택에서 서예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자식들의 발길도 뜸하고 딱히 열정을 쏟는 취미도 없이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던 유키 할머니는 어느 날 시내에 나간 김에 서점에 들렀다가 표지 그림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만화책 한 권을 구입한다. 집에 돌아와서 만화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던 유키 할머니는 이야기 속 사랑의 주체가 남성과 여성, 이 아니라 남성과 남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그 때까지 유키 할머니에게 사랑은 남성과 여성이 하는 것이지 남성과 남성 또는 여성과 여성이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인물들의 감정이 이해가 되었고, 서로에 대한 그들의 감정이 진실하기만 하다면 이성이니 동성이니 하는 구분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유키 할머니는 아침이 밝자마자 다음 권을 사러 서점으로 향한다.


한편,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등학생 우라라는 요즘들어 서점에 자주 들르는 할머니가 자기가 좋아하는 BL 만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오랜만에 흥분한다. 그도 그럴게 우라라는 BL 만화를 몹시 좋아하지만 주변에 우라라처럼 BL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BL 만화를 읽고 감상을 나누거나 BL 행사가 열릴 때마다 손 잡고 갈 친구가 없는 게 내심 늘 아쉬웠던 까닭이다. 용기를 내 유키 할머니에게 말을 건 우라라는 BL 만화에 문외한인 할머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다른 BL 만화를 빌려주면서 유키 할머니와 급속히 가까워진다. 오랫동안 짝사랑 중인 남자(사람)친구에게 고백도 못 하는 우라라로서는 대단한 발전이다.


취미와 취향을 공유하는 '실친(실제 친구 또는 현실 친구)'이 없는 나로서는 유키 할머니와 우라라의 관계가 너무나도 부럽다. 비슷한 또래인 사람에게도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길 어려워하는 나로서는, 나라면 유키 할머니처럼 어린 여고생에게 자신의 새로운 취미를 거리낌 없이 공개할 수 있을까, 나라면 우라라처럼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어르신에게 그렇게 살갑게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반대 상황도 다르지 않다. 실제로 유키 할머니와 비슷한 연세의 할머니나 우라라 또래의 여자 학생이 내가 좋아하는 BL 만화를 좋아한다고 말을 걸면 당황해서 피할 것 같다. 용기는 없고 편견만 많은 나는 평생 취미와 취향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안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권을 읽고 2권, 3권을 읽으면서, 단순히 취미와 취향을 공유하고 싶은 친구를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인생의 한 시기를 함께 보낼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용기를 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고3이 코앞으로 다가온 우라라는 성적에 맞는 대학에 들어가 무난한 직업을 가질지 아니면 어릴 때부터 동경했던 만화가가 될지 결정해야 한다. 일흔다섯 살인 유키 할머니는 당장 좋아하는 작가가 신간을 발표할 때까지 살아있을지 없을지조차 불확실하다. 이런 시기에 우라라는 유키 할머니와 만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만화 행사에 참가하면서 애써 감춰왔던 꿈을 키운다. 유키 할머니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계를 접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도전과 모험을 즐긴다.


만화책을 읽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말고, 인터넷이나 SNS상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만화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말고, 만화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모르던 사람을 알게 되고 경험해본 적 없는 세계에 발을 담그는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까.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고 인생까지 달라지는 체험을 할 수 있을까.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렇다!'라고 말해주는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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