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소설집
정세랑 지음 / 아작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모두 다 2020년에 살아 있다. 하지만 2020년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2020년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사회가 들썩이는 틈을 타 각종 혐오와 차별, 배제의 발언을 쏟아내는 사람은 정녕 2020년을 살고 있을까. 출판사가 상을 명목으로 작가의 저작권을 빼앗고 이에 항의하는 작가와 독자들을 능멸하고 우롱하는 사건은 정녕 2020년의 일이 맞나. 찡그린 미간을 풀 겸, 요즘처럼 힘든 때를 위해 묵혀 두었던 책 한 권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이다.


이 책에는 정세랑 작가가 2010년부터 2019년까지 각종 지면 또는 웹진을 통해 발표한 총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은 자꾸만 사라지는 손가락의 일부를 찾아 시간 여행을 하는 이성애자 커플의 이야기를 그린다. 코니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를 열렬히 좋아하는 팬으로서 오랜만에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소설을 보니 반가웠다. <11분의 1>은 갑자기 사라진 연인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낸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들이 '머나먼 곳으로(far, far away)' 떠난다는 점이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우주에서 한아뿐>을 연상케 한다.


<리셋>은 거대한 지렁이가 인류 문명을 갈아엎는다는 설정의 소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아비규환이 되고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 <버드 박스>를 연상케 했다. <모조 지구 혁명기>는 제목 그대로 지구를 본떠서 만든 '모조 지구'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을 그린다. 지구는 물론 모조 지구와 그 위에서 사는 생명체들을 모두 '디자인'한 '디자이너'의 등장이 재미를 돋운다. <리틀 베이비블루 필>은 기억력이 급속히 떨어지는 환자들을 위해 일시적으로 기억력을 높이는 약이 개발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허구지만, 가까운 시일 내로 실제로 일어날 법하다.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저마다 다른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수용소에 갇혀 지내는 동안 일어날 법한 일을 그린다.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있는 것을 버리는 이야기는 언제 보아도 뭉클하다. <7교시>는 대멸종 이후 살아남은 인류가 과거의 인류에 대해 배우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리셋>의 후반부와 비슷하다.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는 옥탑방에 사는 양궁 선수가 좀비들을 피해 참치캔으로 연명하며 생존을 도모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좀비가 등장하지만, 정윤처럼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고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힘들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지금 대한민국에도 무수히 많다는 걸 알기에 허구로만은 읽히지 않았다.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바랄 수도 없는 - 그랬다가는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타인은 좀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에 실린 소설의 대다수가 최근 1,2년 전이 아닌 그보다 전에 쓰인 작품인 걸 알고 놀랐다. 내가 나에게 닥친 매일매일을 살아내는 일에만 급급할 때,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매일매일을 살아내면서 동시에 과거와 미래, 더 먼 미래를 상상하고 걱정했다니 이래서 작가구나 싶었다. 정세랑 작가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나는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할까 봐 두렵다. 지금의 우리가 19세기와 20세기의 폭력을 역겨워하듯이 말이다." (264-5쪽) 정세랑 작가처럼 미래의 인류가 현재의 인류를 어떻게 볼지 염려하며 사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속도로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면 미래에 인류가 있을지 없을지조차 불확실하지만.


"나는 한 사람의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큰 관심이 없다. 그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들 사이,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관심이 바깥을 향하는 작가들이 판타지나 SF를 쓰게 된다고 생각한다."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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