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룸 - 영원한 이방인, 내 아버지의 닫힌 문 앞에서 Philos Feminism 6
수전 팔루디 지음, 손희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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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마초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는 연락을 받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같지만, 놀랍게도 이는 페미니즘의 고전 <백래시>의 저자 수전 팔루디가 직접 겪은 실화다.


2004년 여름, 저자는 오랫동안 연락을 끊었던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내용은 이랬다. 아버지가 최근 태국을 방문해 성전환 수술을 받았으며 그 결과 '스티브 팔루디'에서 '스테파니 팔루디'가 되었다는 것. 깜짝 놀란 저자는 당장 아버지가 살고 있는 헝가리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아버지가 15년 전쯤 그곳으로 떠난 후 첫 방문이었다. 아버지와 만나 어색한 인사를 나눈 저자는 몇 주 그리고 몇 년에 걸쳐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눴다. 공격적인 마초였던 아버지가 말년에 이르러 돌연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귀부인으로 다시 태어나기로 결정한 '진짜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아버지와의 대화 속에서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헝가리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부모는 돈은 많지만 자식에 대한 정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부모로부터 거의 방치된 채로 자랐다. 아버지가 십 대가 되었을 때 나치가 헝가리를 점령했다. 처음에는 유대인의 직업을 빼앗고 재산을 몰수하는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유대인인 게 들통나면 가족에 친척까지 수용소로 보내졌다. 저자의 아버지는 기지를 발휘해 나치의 일원인 척하며 그 시절을 넘겼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덴마크로, 브라질로,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면서 그 사회의 주류인 척 자신을 위장하고 보호하는 법을 익혔다.


저자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마초맨의 모습으로 기억했다. 그도 그럴 게 아버지는 언제나 남성의 특권을 주장했고 가족들에게 폭군처럼 굴었다. 저자의 어머니가 지방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하자 저녁상을 엎어버렸다. 저자가 친구의 초대를 받아 가톨릭교회에 가보기로 했다고 하자 저자를 심하게 때렸다. 저자의 아버지가 저자에게 성전환 사실을 알리는 메일을 처음 보냈을 때, 저자의 아버지는 "나는 이제 공격적인 마초 맨을 가장하는 게 진절머리가 난다."라고 썼다.


저자는 당시 아버지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가정의 아버지를 연기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성전환 수술을 받고 '여성'이 된 아버지에게서 고압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전혀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저자는 아버지가 헝가리계 유대인으로서 나치 점령기를 살아내는 과정에서 극심한 정체성 불안을 겪었고, 이후 고국을 떠나 낯선 나라, 낯선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생존에 적합한 가면을 쓰고 다니는 생활에 익숙해졌으리라고 분석한다.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헝가리로 돌아간 후 헝가리는 급격히 우경화되었고 유대인, 외국인에게 비우호적인 분위기가 퍼졌다. 유대인이고, 이십 대에 헝가리를 떠났으니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아버지로선 차라리 여성인 편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저자는 모든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아버지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도 밝히듯이, 저자의 아버지는 성전환 수술을 받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동원했다. 대다수의 트랜스젠더는 적법한 과정을 거쳐서 수술을 받았을 것이고, 젠더 및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도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한국도 헝가리 못지않게 복잡한 근현대사를 지닌 나라다. 저자의 아버지처럼, 국권이 넘어가고 정권이 바뀌고 정권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바꿔야만 했던 한국 남자들의 수 또한 부지기수일 터.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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