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들의 당나귀 귀 - 페미니스트를 위한 대중문화 실전 가이드 을들의 당나귀 귀 1
손희정 외 지음, 한국여성노동자회 외 기획 / 후마니타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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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만난 이후로는 예전과 똑같은 눈으로 TV, 영화, 소설, 만화 등의 문화 콘텐츠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전에는 생각 없이 웃으면서 봤던 TV 프로그램들이 중년 남성 연예인들이 장악한 "아재 엔터테인먼트"로 보이고, 때로는 열광하기도 했던 몇몇 한국 영화들이 남성 배우만 기용하고 남성의 시각만을 반영한 "알탕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더 이상 TV나 영화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여성 친화적인 콘텐츠들을 스스로 찾아보게 되었다.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책 <을들의 당나귀 귀>를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은 2016년 5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방송한 팟캐스트 <을들의 당나귀 귀> 중 일부를 엮은 것이다. 책의 1부에선 '한남'과 '아재'를 빼면 성립이 안 되는 현재 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실태를 비롯해 가족 예능 프로그램이 자리 잡게 된 배경과 여성 연예인들이 TV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상에 관해 심도 있게 다룬다. 2부에선 걸그룹, 한국 드라마 속 일하는 여성, 한국 문학 속 일하는 여성, 성매매 등의 주제를 통해 여성의 노동과 성 상품화를 다룬다. 3부에선 <원더우먼>, <아가씨>, <비밀은 없다> 등의 영화를 통해 영상 속 여성의 재현 문제를 다룬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장은 '화려하고 불온한 성채, 여성 혁명가와 여공 문학'이라는 장이다. 나라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남성들만 밖으로 나가서 싸우고 여성들은 나 몰라라 했을까.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다룬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문학 작품 속에서 여성은 지워지거나 그 의미를 제대로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책에선 조선희의 장편 소설 <세 여자>를 통해 그동안 발표된 역사 콘텐츠가 어떻게 여성을 지우거나 의미를 왜곡했는지,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역사 속 여성을 재조명해야 하는지를 조목조목 짚어준다. 아울러 그동안 한국 문학이 남성의 절반도 안 되는 봉급을 받으며, 성희롱과 성폭행이 난무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을 어떻게 그렸는지도 소개한다.


이어지는 '신용사회와 금융, 그리고 성매매'라는 장도 인상 깊게 읽었다. 흔히 성매매라고 하면 "가진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자가 몸 팔아서 쉽게 돈 번다."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상은 다르다. 몸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일단 판매될 만한 몸을 가져야 한다. 판매될 만한 몸을 가지기 위해 성매매 여성들은 돈을 벌기 전부터 엄청난 돈을 들여 성형 수술을 하고, 몸매 관리를 받고, 이른바 '홀복'을 구입한다. 이 과정에서 대부 업체와 성형외과 병원들이 개입해 돈을 번다. 외모에도 유행이 있어서 성매매 여성들은 몇 개월 간격으로 외모를 업그레이드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또다시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이러한 루트를 모르는 일반 여성들은 성매매 업소에 다니는 남성들이나 성형외과 광고, 미디어에 의해 외모를 '후려쳐짐' 당하고, 그중 일부는 성매매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대부 업체에 손을 벌려 성형수술을 받는 악순환에 빠진다.


<원더우먼>에 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원더우먼>의 원작자 윌리엄 마스턴은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다. (원더우먼이 쇠사슬에 묶이면 무력해진다는 설정은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시위하다 붙잡혀 수갑을 찬 모습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윌리엄 마스턴에게는 부인이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유명한 페미니스트인 엘리자베스 마스턴이고, 다른 한 명은 역시 페미니스트인 올리브 번이었다. 세 사람은 한 집에서 같이 사는 '폴리가미' 관계였고,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더 원더우먼 스토리>라는 영화에서는 엘리자베스와 올리브가 애정 관계에 있었다는 묘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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