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타임워프 -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를 기억하는 방법
김신현경.김주희.박차민정 지음 / 반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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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로 세상은 달라지는데, 그 변화는 엇비슷한 욕망의 재생산이 이뤄지는 집단이 아니라 상식과 규범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장에서 싹을 틔운다." (은유, 한겨레 2019년 9월 27일자 삶의 창 <계모임 말고 책모임> 중에서) 얼마 전 은유 작가의 인스타그램에서 이 문장을 읽고 마음이 벅차올라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세상은 '당연한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에 의해 달라진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대에서 자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만, 한때는 침대가 외국인들의 문화라고 배척하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날아간다고 꺼렸던 사람들이 많았다.


페미니즘을 보면 '당연한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에 의해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한국의 여성학자 김신현경, 김주희, 박차민정이 쓴 아홉 편의 글을 엮은 책 <페미니스트 타임워프>는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고 장자연 사건,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 고용 분쟁,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을 지나 최근의 버닝썬 사태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문제들을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분석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고등학교 2학년인 주인공 덕선(혜리 분)은 예쁘장한 외모 덕분에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 피켓을 들고 마다가스카르 선수단과 함께 입장하는 '피켓걸'로 선발된다. 이렇게 젊고 예쁜 여성들이 국가 행사에 동원되는 경우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남아 있다. 김주희는 <발전과 젠더, 환대의 성별정치>라는 글에서 이러한 피켓걸 문화가 "발전을 선전하는 국제적 장에서 여성들은 직접 과시하고 축하받는 위치에 있지 않으며 환대의 수단으로 매개된다." (24쪽)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여성을 행위 주체자로 보지 않고 행위 보조자 또는 환대의 수단으로 본다는 점에서,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일삼는 '룸살롱 접대'와도 일맥상통한다.


2016년에 일어난 강남역 살인 사건은 한국 여성들에게 여성혐오 범죄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한 주요 계기로 여겨진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강남역 살인 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여성혐오 범죄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2016년에 이르러서야 여성이 피해자인 범죄를 여성혐오 범죄로 인식하게 된 것일까. 


김주희는 <우리는 왜 이제야 '여혐 전쟁'을 목격하게 되었나>라는 글에서 그동안 이런 여성혐오 범죄가 여성 문제로 인식되지 못하고, 심리가 불안정한 사이코패스가 일으킨 범죄, 치안이 좋지 않은 교외 지역에서 일어난 범죄, 윤락 여성 등 위험에 처할 확률이 높은 여성들에게 일어난 범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은 비로소 자신도 여성혐오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식했고, 그동안 특정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성폭력, 가정폭력 문제 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깨달았다.


이제는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문제를 민족 문제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사건이 발생한 지 40년이 지나서야 겨우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는 여성 문제로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만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남성이었다면 40년이나 피해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이 자신의 순결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 순결을 지키지 못한 여성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통을 당하는 여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지금 '당연한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에 의해 '당연하다'는 생각들이 바뀌고 있다. 이제 세상이 바뀔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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