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틱 조선 - 우리가 몰랐던 조선인들의 성 이야기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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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팟캐스트를 듣는데 진행자가 "윤 씨 집안 여자 중에 폐비 윤 씨 이후로 가장 유명한 윤 씨 여자가 나왔다."(정확한 워딩이 아닐 수 있다)라는 농 섞인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역사에 기록된 인물 중에 가장 유명한 정씨 여자는 누구일까 곰곰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대하드라마 <여인천하>에 나왔던 정난정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만, 폐비 윤 씨나 정난정이나 자기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한 남자의 아내 또는 첩으로서 당대를 살고 역사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역사에 남은 윤 씨 남자, 정씨 남자들의 이름은 차고 넘치는데, 같은 집안에서 태어난 윤 씨 여자, 정씨 여자들은 고작 한두 명만 이름이(혹은 성씨만) 남았다는 것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박영규의 <에로틱 조선>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분노를 느꼈다. 저자는 현재까지 200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조선 왕 시크릿 파일> 등 다수의 대중 역사책을 썼다. 저자는 그동안 수많은 역사책을 쓰면서 역사에 나오는 인물 중 절대다수가 남자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예나 지금이나 인구의 절반이 남성이면 나머지 절반은 여성이다. 그런데 역사에 나오는 인물의 대부분이 남성이고, 여성은 어머니, 아내, 딸, 심지어는 첩이나 기생 같은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만 나온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history)가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남성의 역사(his-story)'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조선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역사만을 찾아봤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 <에로틱 조선>이다.


조선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역사만을 찾아보니 그 실체는 참담했다. 가부장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여성은 남성들이 성욕을 풀고 번식을 하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절대 권력을 지닌 왕은 물론 유교를 숭상하는 점잖은 양반들도 부인 말고도 첩을 여러 명 거느리는 일이 허다했고, 기생과 어울리거나 집안일을 돕는 여종을 취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정실부인이나 첩이나, 여염집 여인이나 기생이나, 궁녀나 의녀나, 신분이 다르고 지위가 달라도 남성의 희롱과 강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라는 점은 같았다. 같은 죄를 지어도 남자는 가볍게, 여자는 무겁게 처벌받는 경우도 많았고, 남자라는 이유로 처벌조차 받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춘화나 육담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편이다. 이는 달리 생각하면 직접 성행위를 해서 성욕을 해소하는 것이 언제든 가능하고 딱히 지탄받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인 춘화나 육담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이 책뿐 아니라 다른 책들을 봐도 조선 시대의 성 문화는 모순적인 점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배층은 유교를 근거로 피지배층의 성생활을 통제하려고 했다.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성생활을 통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만큼 피지배층의 성생활이 자유분방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자유가 남성에게만 허용되고 여성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부장제를 위협하는 존재인 동성애자, 양성애자에 대한 탄압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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