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이 있다 - 그래도 다시 일어서 손잡아주는, 김지은 인터뷰집
김지은 지음 / 헤이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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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중심 사회에서 당당히 성공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나에게 언제나 신선한 자극을 주고 더욱 씩씩하게 살아갈 용기를 준다. 게다가 그 여성들이, 남성들이 주도하는 사회의 온갖 폐단과 해악을 극복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라면 이보다 더 동기부여가 되는 이야기는 없다.


<한국일보> 기자 김지은의 <언니들이 있다>는 최인아, 최아룡, 이나영, 김일란, 이진순, 장혜영, 김인선, 배은심, 고민정, 김미경, 박세리, 곽정은 등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열정적으로 일하고 멋지게 성공한 여성들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명사들의 인터뷰집이라고 하면 자신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일러주는 수준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명사 자신이 여성으로서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차별이나 모순을 맞닥뜨렸는지, 그러한 차별이나 모순을 극복하고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일러주는 점이 좋았다.


인터뷰 하나하나가 주옥같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 2003년 서강대 교수 성폭력 사건을 고발한 최아룡의 인터뷰다. 지금처럼 미투 운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16년 전, 그는 TV에 출연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고발했고, 이로 인해 가해자 동료 교수들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고 다니던 대학에서 쫓겨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성폭력 당한 사실을 고발하지 않았다면 대학에 남아 교수가 되고 평탄한 인생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학위를 포기하고 개인 자격으로 전공 관련 국제학회를 찾아다니며 독립 학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요가를 시작해 강사 자격증까지 취득했고, 그 결과 지금은 자신과 같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비롯해 미혼모, 장애아, 알코올중독자, 노숙자 등에게 요가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 정도면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한다'는 헛소리가 판치는 세상에 펀치를 날리는 삶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독일에서 호스피스 일을 하는 60대 레즈비언 김인선의 인터뷰도 기억에 남는다.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자각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이성애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한인 교회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결혼했던 남자와는 3년 만에 이혼하고 사랑에 빠진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목사 대신 호스피스가 되어 죽음을 앞둔 이민자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다. '동성애 퇴치'를 외치는 한국의 보수 개신교 목사들에게 그는 묻는다. "하나님이 과연 동성애자는 사랑하지 않고, 이성애자만 사랑하시는 분일까요? 예수님이 만약 (퀴어 퍼레이드에) 오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내 생각에는 우리(퀴어)와 함께 행진하셨을 것 같은데!" (164쪽)


한국 골프의 전성기를 연 박세리 선수의 인터뷰에선 뜻밖에도 '자매애'라는 키워드를 발견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박세리 선수의 곁에는 가족도 없고 제대로 된 에이전트도 없었다. 그때 낸시 로페즈 선수가 박세리 선수를 보더니 마치 신인 시절의 자신 같다며 친엄마처럼 돌봐주었다. 이후 박세리 선수가 슬럼프에 빠져 힘든 시간을 보낼 때에도 수많은 여성 동료들이 박세리 선수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고 말하고 실제로 그런 사례가 없지는 않겠지만, 여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 역시 여성이며, 여성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지 역시 여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책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여성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언니들'의 솔직하고 진솔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인터뷰 한 편 한 편이 다 좋아서 몇 개만 추려서 소개하기가 힘들었다. 부디 이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를 꼼꼼히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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