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30대 워킹맘 세라는 착실하게 공부해 박사 학위를 따고 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얻었다. 얼마 후에 있을 승진 심사만 통과하면 교수가 되어 별거 중인 남편 없이도 두 아이를 안정적으로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걸림돌이 생긴다. 세라가 교수로 승진해도 될지 안 될지 심사할 권한을 가진 앨런 러브록 교수가 세라에게 추근대는 것으로 모자라 잠자리를 요구한 것이다. 세라는 인사부에 신고할 생각을 해보지만, 신고를 했다가는 교수 임용에 탈락하는 것은 물론 대학에서도 쫓겨날 게 뻔하다. 세라의 고민은 깊어지고 러브록의 추근댐은 점점 더 심해지는 가운데, 세라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달콤한 제안이 들려온다. "내게 이름 하나를 주십시오. 한 사람의 이름을. 내가 그 사람을 사라지게 해주지. 당신을 위해서."


데뷔작 <리얼 라이즈>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T. M. 로건의 신작 <29초>는 직장 내 성희롱에 시달리는 30대 워킹맘 세라가 뜻밖의 계기로 자신을 괴롭히는 인물을 없앨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스릴러 소설이다. 세라가 선의로 한 어떤 일에 대한 대가로, 세라가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을 죽여주겠다는 볼코프의 제안을 받고 의외로 세라는 오랫동안 고민한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없애서 편해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아무리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해도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면 안 되고, 타인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면 결국 그 사람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한 판단과 행동을 한다 해도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죄를 뉘우치고 미안해 하기는커녕, 나의 선한 판단과 행동을 약점으로 삼고 더욱 심하게 나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세라만 봐도 그렇다. 세라가 볼코프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는 동안, 러브록은 자신이 세라에게 한 짓을 뉘우치거나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전보다 더욱 심하게 세라를 괴롭힌다. 세라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세라와 러브록의 사이를 오해한 사람들이 세라의 본심을 몰라줘서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한다. 심지어 세라가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먼저 러브록을 유혹했다고 여기는 사람들까지 나타난다.


적극적이고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세라를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세라를 그렇게 만든 건 세라 자신이 아니라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세라에게 안정적인 직장이 있었다면, 성희롱을 당했다고 신고를 하면 정상적인 처리가 이루어질 거라고 믿을 수 있는 직장이었다면, 당장 직장을 잃어도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있고, 금방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면 세라는 맨처음 러브록에게 성희롱을 당했을 때 바로 신고하고 이후에 벌어진 나쁜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법과 제도가 나를 구해주지 않으면 나 스스로 나를 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모든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범법자가 되고 반체제 인사가 되어야 한다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거니와 지나치게 불공평하다. 남자들은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법과 제도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법과 제도의 덕을 보고 사는데, 왜 여자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법과 제도에 맞서 싸우고 법과 제도를 뜯어고쳐야 하는 입장에 서야 하는가. 애초에 러브록이 세라를 여자가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같은 대학에서 일하는 학자로 대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왜 나쁜 남자들은 바뀌지 않고 착한 여자들이 스스로 바뀌는 수고를 해야 하는 걸까. 피곤하고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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