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세랑 작가의 소설은 밝고 재미있어서 좋다.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에 실린 소설들도 대체로 명랑하고 유쾌하다. 이를테면 표제작 <옥상에서 만나요>가 그렇다. 화자인 '나'는 취업난을 뚫고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서 시도 때도 없이 성희롱을 당한다. 이러면 덜할까 싶어 머리를 스포츠머리보다 짧게 잘랐더니 이번에는 은근한 희롱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시비를 걸었다. 하필 이때 그동안 함께 옥상에서 담배 피우며 수다를 떨었던 회사 언니들이 연달아 시집을 간다며 사표를 냈다. 어쩌면 나만 두고 이럴 수 있느냐고 묻자 언니들이 주뼛주뼛 낡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제목은 <규중조녀비서>. 소원을 빌면 남편이 나타나는 신비의 책이라나 뭐라나. ​ 


한 벌의 웨딩드레스를 거쳐간 44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웨딩드레스44>, 한국과 일본, 중국을 아우르며 활동한 가왜(假倭) 은열을 동경하던 여성이 한국과 일본, 대만, 호주를 아우르는 환태평양 밴드의 멤버로 활동하는 <알다시피, 은열>도 재미있다. 지하도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목덜미를 물리는 바람에 좀비가 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원히 77사이즈>, 잘린 귀에서 과자가 자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해피 쿠키 이어>, 이혼을 결정한 친구의 살림을 나눠 받게 된 고등학교 동창들의 이야기인 <이혼 세일>, 글자 그대로 많이 먹는 나라인 대식국(大食國)과 적게 먹는 나라인 소식국(小食國) 사이에서 벌어진 분쟁을 그린 <이마와 모래>도 흥미롭다. ​ 


<효진>과 <보늬>는 마냥 밝고 유쾌하지만은 않다. <효진>은 화자인 효진이 '너'에게 건네는 말의 형태로 된 소설이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란 효진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으나 바랐던 일들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는 일본에서 제과를 배우고 있다. <보늬>는 과로로 돌연사한 언니를 기리기 위해 돌연사 맵을 만드는 보윤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작품 모두 죽어라 공부하고 밤낮없이 일했던 두 여성이 삶을 충분히 만끽할 기회도 누리지 못한 채 원래의 공동체에서 밀려나거나 급기야 목숨을 잃는 모습을 그린다. 팝핑 캔디처럼 가볍게 톡톡 튀는 이야기들 사이에 있어서 그런지 더욱 무겁고 아프게 느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