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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소설가들의 소설가, 루시아 벌린의 단편집 <청소부 매뉴얼>을 읽었다. 이 책을 읽으려면 우선 작가 루시아 벌린의 생애에 관해 알아야 한다. 1936년생인 루시아 벌린은 24살에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미국 서부 탄광촌과 칠레 등지에서 10대를 보냈고, 32살에 이미 세 번 이혼했고 네 아들을 낳았으며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해야 했던 루시아 벌린은 버클리와 오클랜드에서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원,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 등의 일을 했고 그러면서도 글을 썼다. 200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루시아 벌린은 평생에 모두 76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청소부 매뉴얼>에는 그중 43편이 실려 있고, 대부분이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표제작 <청소부 매뉴얼>은 여러 집을 전전하며 청소부 일을 하는 여자의 고단한 삶이 자세히 나온다. 집주인들은 청소부가 청소를 완벽하게 하는지보다 물건을 훔치지는 않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그래서 저자는 일을 시작할 때 면저 시계나 반지, 비싼 핸드백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파악한다. 나중에 그들이 집에 돌아와 물건의 소재를 확인할 때면 차분하게 '베개 밑, 아보카도 색 변기 뒤' 하는 식으로 위치를 말해주기 위해서다. <나의 기수>와 <관점>은 저자가 응급실 또는 내과 병원에서 일할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 같다.
<에인절의 빨래방>은 저자가 싱글맘으로 네 아이를 키우며 힘들게 살던 시절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저자의 분신으로 보이는 '나'가 한 주에 몇 번씩 기저귀를 빨러가는 에인절 빨래방은 근처에 사는 노인들과 인디언들, 멕시코인들, 푸에르토리코인들의 사랑방이다. 여기서 만난 어떤 할머니는 '나'에게 집 열쇠를 주면서, 언젠가 자신이 보이지 않으면 죽은 줄 알고 시신을 거두어달라고 부탁한다. 어떤 할아버지는 거울로 '나'의 손을 흘끗흘끗 보다가 마침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이고 농을 건네며 치근댄다. 할아버지는 자꾸만 '나'가 인디언인 것 같다고 우기고, '나'는 할아버지의 눈길을 피하면서 벽에 붙은 게시문을 읽는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아기 침대 팝니다 - 아기를 사산했음."
<호랑이에게 물어뜯기다>는 저자가 첫 번째 남편과 헤어진 후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울지 말지 고민하던 시기의 이야기를 그린다. '나'는 아들 벤을 데리고 사촌인 벨라 린의 집을 방문한다. '나'는 벨라 린에게 열일곱 살 때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남자 조가 자신을 떠났고, 조와의 두 번째 아이가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벨라 린은 '나'에게 낙태 수술을 제안하고, 그 길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낙태 수술을 받으러 간다. <그녀의 첫 중독치료>는 저자 자신의 알코올 중독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나'는 장남과 차남에게 삼남과 사남을 맡기고 중독 치료자를 위한 재활 병동에 들어간다. 재직 중인 학교에는 난소종양 수술을 받으러 간다고 거짓말을 한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허구를 전제로 하는 문학이지만, 루시아 벌린의 소설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허구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는다. 쓰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인생은 소설이 되기도 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