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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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를 읽고 단번에 팬이 된, 박상영 작가의 소설집이 나왔다. 제목은 <대도시의 사랑법>. 2019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을 비롯한 총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나는 이 중에 표제작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를 먼저 읽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주인공 '나'가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규호'라는 남자를 만나 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전부 모이면 여섯 명이라서 '티아라'라고 이름 붙인 친구들과 클럽을 찾은 '나'는 친구 '지연'이 난동 부리는 걸 말리다가 밀쳐져 쓰러지고 입술에 피가 난다. 이때 자신을 부축해 일으켜 세워준 사람이 규호였고, 다정함에 감동한 '나'는 규호에게 키스를 해버리고 만다. 그 후로 영영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나'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뮤지컬 극장으로 규호가 찾아오고, 규호가 일하는 이태원 클럽으로 '나'가 다시 찾아가면서 둘은 점점 특별한 사이가 되고 사귀게 된다.


문제는 '나'가 규호에게 '5년도 넘게 나와 함께 살아온 가족'이자 '또 다른 나'라며 '카일리'의 존재를 밝히면서 비로소 드러난다. 작가는 한 번도 HIV라는 단어를 쓰지 않지만, 카일리의 정체가 HIV라는 걸 독자는 안다. 카일리 때문에 '나'와 규호가 연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성관계를 할 수 없고, 그로 인해 불행해질 거라는 것도 안다. '나'는 카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규호가 자신을 온전히 받아주고 자신의 곁을 지키는 게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영민하고 성실한 규호가 자신 때문에 제약된 삶을 사는 게 안타깝고 미안하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규호의 등을 떠밀고 규호에게 다른 남자를 만나라고 성화를 부린다. 그러면서도 규호가 정말 '나'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나'와 규호가 제약된 삶을 사는 게 단지 카일리 때문일까. '나'와 규호는 가난하다. 안정된 직업을 가지기 어렵고, 가족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다. 주택청약 당첨, 주택 담보 대출 등 이성애 부부가 당연히 누리는 혜택을 동성애 커플은 똑같이 누릴 수 없다. 성관계를 가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잘 사귀었던 '나'와 규호가 헤어진 이유도 결국 돈이다. 어쩌면 인천에서 이태원으로 출퇴근하던 규호가 '나'와 사귄 이유 중 하나도 '나'의 집이 서울에 있고, 여차하면 '나'의 집에 머무르면서 돈을 절약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을지 모른다(실제로 규호는 '나'의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된다).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규호는 한 시절을 '나'의 곁에 머물렀고, '나'는 그 시절을 평생에 걸쳐 기억할 것이다. 나 자신도 좋아할 수 없었던 나를 좋아해준 사람. 그게 바로 규호이므로.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대도시의 사랑법>보다 먼저 발표되었지만, 작품 자체는 <대도시의 사랑법> 이후의 이야기를 그린다. 규호와 헤어진 후 '나'는 규호가 집에 들어올 때 함께 가져온 침대 매트리스를 버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방콕행 비행기를 탄다. 데이팅 앱에서 알게 된, 싱가포르계 말레이시아인 '하비비'를 만나기 위해서다. 얄궂게도 '나'와 하비비가 묵게 될 숙소는 오래전 '나'가 규호와 함께 묵었던 그 고급 호텔이다. 그때는 카일리 때문에 마음 놓고 성관계를 즐길 수 없었지만, 이제는 HIV prEP(프렙: 노출 전 예방요법)을 위한 약물 처방이 승인되어 카일리 걱정 없이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규호가 없다. 다이어트, 주택청약 당첨, 포르셰 카이엔, 첫 책 대박 같은 소원이 이루어져도 규호가 없다면 공허하고 무의미할 뿐이다. 그렇게 '나'는 규호와 함께 했던 추억을 지울수록 자신도 함께 지워지는 걸 느낀다.


이어지는 두 편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정신없이 웃다가 또 정신없이 울었다. 사랑이 뭐라고,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들. 사랑이 뭐라고, 그 사랑을 떠나보낸 바보들. 이제까지 슬픈 사랑 이야기를 읽고 다른 결말을 상상해본 적은 없는데, 이 소설은 '나'와 규호가 다시 만나 함께 행복해진 결말을 일부러 상상해봤다. 작가님도 상상해보셨을까. 상상해보셨다면 부디 써주시고 발표해주셨으면 ㅠㅠ


책을 덮으니 오래전 미국 드라마 <퀴어 애즈 포크>가 생각났다. 최근에 본 일본 드라마 <어제 뭐 먹었어?>도 생각났다. 20여 년 전 <퀴어 애즈 포크>를 볼 때만 해도 성소수자, LGBT란 용어조차 생경했다. <어제 뭐 먹었어?>가 방영된 지금은 일본 같은 보수적인 나라에서도 동성혼 합법화가 의제화되고 있다. 한국도 곧 뒤따를 거라고 기대한다(앞지르면 더 좋다). 퀴어 서사가 여기까지 왔다. 한국 문학의 새로운 별, 박상영은 어디까지 갈까.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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