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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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아. 내가 게이 소설 좋아하는 거 알고 있지? 앤드루 숀 그리어의 소설 <레스>도 그래서 읽었어. 솔직히 처음부터 잘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어. 주인공 아서 레스가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 지에 관한 힌트가 아주 조금씩, 천천히 제시되는 소설이거든.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레스는 게이와 작가라는 두 정체성을 버팀목으로 살아가는 남자야. 그리고 현재 그 두 정체성은 위기를 맞고 있지. 일단 게이로서의 정체성부터 볼게. 레스는 젊은 시절 여러 명의 남자를 사귀었어. 아마 연상 남자를 무척 좋아했던 것 같아. 그중 제법 오랜 기간 사귀었던 로버트라는 남자는 퓰리처상까지 받은 유명한 시인이야. 레스와 로버트가 처음 만났을 때 로버트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결국 로버트는 레스를 위해 아내를 떠났어. 이후 레스와 로버트는 불꽃같은 사랑을 나눴지만 여느 커플처럼 이별을 택했어.


로버트와 헤어진 후 레스는 프레디를 만났어. 프레디는 젊은 시절부터 레스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카를로스의 아들이야(참고로 카를로스도 게이야). 그 때까지 자신의 취향은 연상 남자라고 굳게 믿었던 레스는, 젊고 건강하고 똑똑한 프레디의 매력에 빠져 정신을 못 차렸던 듯해. 그렇게 둘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결국 이들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찾아왔어. 레스는 언젠가 로버트가 자신을 놓아줬던 것처럼 쿨하게 프레디를 놓아줄 수 있을 줄 알았어. 하지만 그렇지 못했어. 프레디가 다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들은 레스는, 프레디의 결혼식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거든.


그래서 레스는 떠나. 멕시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모로코, 인도, 일본으로. 레스의 여행이 어땠을 것 같아? 나는 실연을 당한 레스가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소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떠올랐어(클리셰다, 클리셰. 뭐 이런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 하지만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엘리자베스가 이탈리아에서 배 터지게 먹다 사랑하고, 인도에서 몸이 꼬일 정도로 요가를 하다 사랑하고, 발리에서 신들의 힘으로 사랑하는 황홀한 경험을 한 것과 달리, 레스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체험들을 더 많이 해(한두 번 사랑에 빠질 뻔하기도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닌 소설이야. 이 또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와 다른 점이지). 그건 레스가 남성으로서도, 게이로서도 매력적인 시기는 다 흘려보낸 50대 중년의 나이이기 때문이고, 작가로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듯해.


여행을 하면서 레스는 별별 장소에서 별별 사람들로부터 별별 말을 다 들어. 레스가 진행을 맡기로 한 행사의 주인공인 작가를 만나러 갔을 때는 어떤 숙녀로부터 "당신 대체 누구야?"라는 말을 듣지 않나,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옛 연인으로부터는 "이제 우리 둘을 좀 보라니까, 할아버지들이야!"라는 말을 듣지 않나, 레스가 인기가 없는 건 '형편없는 작가'여서가 아니라 '형편없는 게이'여서라는 말을 듣지 않나, '백인 중년 미국 남자가 백인 중년 미국인의 슬픔을 품고 걸어 다니'는 내용의 소설을 읽고 누가 공감하겠느냐는 말을 듣지 않나... 나 같으면 심장에 스크래치가 백 개쯤 났을 것 같은데, 레스는 그런 모욕을 꿋꿋이 참아내며 여행을 계속해. 오래 전 한 평론가가 <뉴욕 타임스>에 레스를 가리켜 '도도한 스타일의 바보 사랑꾼'이라고 조롱했던 일에 비하면 별일 아니라고 여겼던 걸까. 


근데 말이야.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 소리를 들었던 우리의 레스가, 이 여행을 통해 사랑 말고도 다른 것들을 많이 알게 돼.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은 역시 루이스와 클라크의 결혼 생활의 진실을 알게 된 일이 아닐까. 레스는 그동안 루이스와 클라크가 자신이 아는 게이 커플 중에서도 가장 잘 지내는, 성공적인 커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레스는 비로소 자신이 못나고 부족해서 이 나이 먹도록 한 사람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게 아님을 알게 된 것 같아. 때로는 사람은 그대로인데 사랑이 먼저 떠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기도 하고. 

 

레스는 또 모로코에서 낙타 치기 소년 한 명이 다른 소년에게 팔을 두르는 모습을 봐. 레스가 사는 시카고 거리에서는 한 번도 이성애자 남성들이 이렇게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 반대로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에서는 남성들이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거나 끌어안아도 그들을 게이로 보지 않아(이건 한국도 다르지 않지). 어쩌면 레스는 자신이 게이로서 사랑하는 남자와 마음껏 사랑할 자유는 누렸을지 몰라도, 남자와 친구로서 마음을 터놓고 편히 사귈 자유는 누리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 같아. 사랑만 보고 사람은 보지 못하는 실수. 이건 나도 몇 번인가 저지른 듯해.


레스는 자신이 그동안 제법 괜찮은 소설을 써왔고, 의외로 여러 독자들이 자신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도 알게 돼. 레스 자신이 아는지 모르겠는데, 내 눈에는 레스의 대표작 <칼립소>가 레스 자신의 인생을 예감하고 쓴 듯한 작품처럼 보였어. 레스의 말에 따르면, <칼립소>는 <오디세이아>를 본따서 쓴 작품이래. 마치 오디세우스가 그 모든 모험과 방황, 일탈 끝에 페넬로페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칼립소>의 주인공 또한 다사다난했던 게이 연애를 마치고 자신의 아내에게로 돌아가는 내용이라는데, 결국 레스도 지구를 한 바퀴 빙 도는 긴 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거든(그 자리가 누구의 옆 자리인지는 비밀로 둘게).


<레스>의 마지막 몇 장은 레스가 아닌, 바로 그 '누구'의 시선으로 서술돼. 그 시선이 얼마나 황홀하고 촉촉한지, 오랫동안 비연애 상태인 내가 오랜만에 연애를 하고 싶어질 정도였어. 그만큼 사랑스러운 소설이야. 아니, 사랑 그 자체야. 읽는 사람 모두를 '바보 사랑꾼'으로 만들어 버리는 소설 <레스>. 너도 꼭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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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 2019-06-19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어렵지 않았나요?
전 읽는 내내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겟더라구요.

키치 2019-06-19 20:40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몰입하기가 좀 힘들었는데 읽다보니 술술 읽혔습니다.
결말이 괜찮으니 끝까지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