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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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직을 박차고 일본으로 떠났던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이 돌아왔다. '노인을 위한 성인 만화'를 그리겠다는 포부를 안고 교토사가예술대학 단기대학부에 진학한 김정운이 한국에 돌아와 터 잡은 곳은 바로 여수. 이제는 노랫말로 더 익숙한 '여수 밤바다'가 보이는 해변에 작업실 겸 집을 짓고, 아침에 눈 뜨면 그림 그리고 글 쓰고 가끔은 배 타고 나가 눈먼 고기를 잡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저자가 여수에 만든 바닷가 작업실을 심리학 용어로 치환하면 '슈필라움(Spielraum)'이다. 독일어에만 존재하는 이 말은 '놀이(Spiel)'와 '공간(Raum)'이 합쳐진 단어로, 단순히 물리적으로 놀이하는 공간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여유를 느낄 수 있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의미한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들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자기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슈필라움'이 필요하다. 인간은 '슈필라움'에서 잠시나마 사회적 가면을 내려놓고 자의식을 확인하면서 자기를 재충전하고 사회성을 회복한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압축 성장을 경험한 대한민국의 사회심리학적 문제는 대부분 이 '슈필라움'의 부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한국 남자들의 '슈필라움'의 부재로 인한 부작용은 매우 심각하다.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자동차에 집착한다. 평소엔 얌전하고 매너 좋은 사람도 자동차 운전석에만 앉으면 본성을 발휘한다. 그래서 매일 밤 '자연인'을 넋 놓고 본다. 모든 사회적 의무를 내려놓고 가족과도 떨어져 오롯이 혼자서 생활하는 자연인의 모습을 동경하듯 바라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어떤 연고도 없이 충동적으로 여수에 와서 살면서 직접 경험하고 성찰한 것들을 유머러스한 문장으로 소개한다. 횟집 하다가 망해 창고처럼 버려진 곳을 아주 싼 월세로 얻어 화실로 바꾼 이야기, 화실에 앉아 정작 그리려고 결심한 그림은 안 그리고 바다만 바라본 이야기, 낡고 작은 배 하나를 샀다가 수리하는 데 더 큰돈을 쓴 이야기, 가족과 친구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미역 창고를 구입해 작업실로 개조한 이야기 등이 시트콤처럼 펼쳐진다. 그저 재미만 있는 게 아니라 지식도 있고 교훈도 있다. 저자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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