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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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크게 두 갈래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용의자 X의 헌신>을 비롯한 본격추리 또는 사회파 미스터리물이고, 다른 하나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비롯한 감동소설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2003년작 <편지>는 후자에 속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한 형제가 있다. 형 츠요시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어머니의 속을 썩인다. 동생 나오키는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형이 자꾸만 엇나가서 답답하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몸으로 두 형제를 키워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츠요시는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이삿짐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나오키는 너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야 한다는 형의 말에 따라 학교에 다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생활도 끝이 난다. 츠요시가 살인강도 혐의로 경찰에 붙잡혀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그 후 나오키에게는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진다.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세 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났고, 학교에서도 전학을 가거나 학교를 그만두라는 압박을 받는다.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형의 전과가 드러나면 채용조차 안 된다. 그래서 나오키는 형의 전과를 숨기고 아르바이트를 구하는데 쉽지 않다. 할 수 없이 임금이 싼 일자리를 전전하며 괴로운 날들을 보내는 나오키는 형이 매달 보내오는 편지가 귀찮고 부담스럽다. 감옥에 있는 형을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바로 그 형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불행의 나락으로 빠졌다는 생각을 하면 원망스럽다.


나라도 형이 원망스럽겠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형이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나오키는 제법 괜찮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오키는 지역에서 가장 진학률이 높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잘생겨서 이성에게 인기도 많았다. 잘하면 인기 록그룹의 보컬로 신나는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부잣집 사위가 되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오키는 매번 형의 전과 때문에 발목이 잡힌다. 가족이 살인자라는 이유로 나오키에게 등 돌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가 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러나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스스로 먼저 도망치는 나오키를 볼 때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나오키는 형을 핑계로 자신의 약함이나 비겁함을 가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만약 나오키가 어떻게든 음악을 계속했다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버텼다면 또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그 또한 불행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건 내가 선택한 일이니 형의 전과만을 탓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는 나오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빽'이 없어서, 명문대 간판이 없어서, 외모가 별로라서, 스펙이 남들만 못해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고 말한다. 여자라서, 장애가 있어서, 다문화 가정 출신이라서, 외국인이라서 등등의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런 말들은 대체로 사실일 것이다. 이 사회에는 불평등이 만연하고 차별이 공공연하게 벌어진다. 예전부터 그랬고, 적극적으로 바로잡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불평등하고 차별이 있다는 이유로 좌절하고 포기하면 결국 자신만 손해다. 온 세상이 "너는 안 돼."라고 말해도 자기 자신만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줘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할 기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기회,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 행복해질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나오키만 봐도 스스로에게 행복해질 기회(대학 진학, 연애)를 주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졌고,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을 때 결국 불행해졌다. 허공에서 날아오는 돌을 막을 순 없지만, 돌에 맞았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는 직접 정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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