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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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완독한 일본 만화 <마스터 키튼>의 주인공 '히라가 키튼 타이치'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학자로 설정되어 있다. 현재는 보험조사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장래에는 고고학자가 되는 것이 꿈인 그는 틈만 나면 각국의 발굴지를 찾아가 유물을 채취하거나 유적을 탐사하며 시간을 보낸다.


허수경 시인이 1992년 돌연 독일 유학을 떠난 것도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의 편안하고 익숙한 삶을 버리고 독일로 떠난 시인은 기숙사 아니면 셋방을 전전하며 공부에 몰두했다. 여름방학이면 오리엔트로 발굴을 하러 가기도 했다. 그곳에는 기숙사나 셋방만 한 숙소조차 없어서 여러 명이 임시로 지은 텐트에서 생활해야 했다. 서울의 빽빽한 빌딩 숲을 벗어나면 오히려 답답함을 느끼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환경이다. 대체 시인은 거기서 무엇을 찾고 싶었던 걸까.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는 2003년 2월에 나온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의 개정판이다. 이 책은 저자가 쓴 139개의 짧은 산문과 9통의 긴 편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저자가 독일 유학 중에 경험한 일들이나 만난 사람들, 고향에 대한 그리움, 발굴을 하면서 겪은 일들에 관한 단상을 담고 있다.


저자는 서양의 고급 식당에 앉아서 소리를 내면서 수프를 들이키는 고향 선배를 보며 창피함을 느낀다. 민박을 하는 독일인에게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쌍둥이칼을 많이 사느냐, 너희 민족은 닌자냐는 말을 들으며 민망해한다. 한국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저자가 얼굴을 붉힌 건 조국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넘쳐서다. 저자는 대학 시절 동기들과 십시일반 돈을 모아 나누어 마셨던 막걸리의 맛을 그리워한다. 중국 식당이나 베트남 쌀국숫집에서 먹는 음식으로는 한국 음식에 대한 갈증을 대신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진주 유등축제, 시골 오일장, 강변, 골목길, 주점 등등 한국에만 있는 풍경, 한국에만 있는 특별한 정서를 낯선 이국에선 찾을 길이 없다.


저자가 낯선 이국땅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발굴지를 탐사하며 찾고 싶었던 건 새롭고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익숙하고 보편적인 무언가이지 않았을까 싶다.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는 땅에도 한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걸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수천 년에 죽고 사라진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화해하며 살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과거와 현재가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듯이, 여기와 저기가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고, 너와 내가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부디 하늘에선 편히 쉬고, 맛있는 음식 많이 먹고, 더는 외롭지 않으시기를. 너무 일찍 세상을 등진 이의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마음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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