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까지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꾸준히 읽어온 건, 소설 자체에 대한 애정보다도 '이번엔 또 어떤 자극적인 소재를 선정했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취업난과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호주 이민을 택한 20대 청년의 모습을 그린 <한국이 싫어서>를 비롯해, 통일 이후 절망적인 한반도의 상황을 상상한 <우리의 소원은 통일>, 2012년 국정원 여론조작 의혹 사건의 실체를 밝힌 <댓글 부대> 등은 문장의 유려함이나 구성의 탄탄함보다도 자극적인 소재와 치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나로서는 한 번 읽기에는 괜찮지만 여러 번 반복해 읽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작품들이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장강명 작가의 전작을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건, 장강명과 요조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 때문이다. <책, 이게 뭐라고>의 오랜 애청자인 나는 장강명 작가가 김관 기자의 뒤를 이어 진행자석에 앉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장강명 작가가 게스트에게 던지는 질문이 궁금해 매주 <책, 이게 뭐라고>를 듣는다. 어떤 인터뷰어들은 질문을 가장해 자신의 지식이나 경력을 뽐내려고 하는데, 장강명 작가는 그런 면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인터뷰어들은 인터뷰이와 친목질하는 데에만 급급해 정작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하지 않는데, 장강명 작가는 독자가 궁금해하는 것은 물론, 애써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까지 질문한다. 이는 그가 오랜 기간 유력 신문사의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터득한 기술이기도 하겠지만, (슬프게도) 모든 기자가 다 이런 기술을 갖춘 건 아니기에 더 귀하게 느껴진다.


각설하고, <표백>은 장강명 작가가 2011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이자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7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서울에 있는 A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했고 군대를 다녀와 얼마 전 복학했다. 학과에서 주최한 취업선배들과의 대화 행사 뒤풀이에 참석한 나는 미모면 미모, 스펙이면 스펙, 빠지는 것이 없는 세연과 경영학과 동기인 휘영, 후배 병권, 세연의 친구 추윤영 등과 어울리게 된다. 세연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나, 휘연, 병권, 윤영의 마음을 장악하고, 자신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자살을 준비했으니 너희들도 나를 따라서 자살하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제로 세연은 학교 연못에서 자살한다. 이때만 해도 나와 친구들은 세연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극심한 취업난과 생활고, 이상과 전혀 다른 현실을 겪으며 서서히 자살을 꿈꾸게 된다.


작가는 모든 틀이 다 짜여 있는 세상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된 젊은 세대를 '표백 세대'라고 일컫는다. 사람은 모두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 고유한 색깔을 지니고 태어난다. 하지만 이 세계는 단 한 가지 색깔만 요구한다. 한 점의 티도 없고 얼룩도 없는 하양이 되기를 강요한다. 한국 사회에는 정해진 인생 경로가 있고, 그 경로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무조건 괴짜 아니면 루저 취급받는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 있는 독자라면 작가의 문제의식에 공감할 것이다. 문제를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 자살이라는 설정은 일견 지나쳐 보이지만, 실제로 한국 청년들의 사망 원인 제1위가 자살이고, 많은 청년들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떠올리면 지나치지만은 않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소설이 청춘을 미화하지 않아서 좋았다. 수많은 어른들이 젊음을 부러워한다. 수많은 책이, 영화가, 드라마가 청춘을 찬양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청춘을 보내고 있는 10대, 20대들의 상황은 결코 찬양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내가 그랬듯이, 젊은이들 대부분은 이유도 목적도 없이 대학 입시를 치르고 취업 준비를 한다. 젊다고 열정 노동을 강요당하고, 어리다고 임금 후려치기를 당한다. 성차별, 학력차별, 계급 차별 등등을 만들어낸 건 어른들인데, 정작 이들끼리 서로를 혐오하고 깎아내리느라 정신이 없다. 이런데도 젊음이 부럽다고 말하는 건 무책임하고, 차라리 모욕이다.


장강명 작가의 여느 소설이 그렇듯이 잘 읽히고 뒷맛은 씁쓸하다. 출간 당시에도 화제가 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여러 번 다시 언급되며 재평가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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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6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키치 2019-02-08 08:35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