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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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까지 아홉 시간이 남았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셈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편안하게 보내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할수록 긴장이 됐고, 그러자 시간이 몇 배는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출판사 아르테(Arte)에서 야심 차게 내놓은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의 첫 책.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다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는 작가 은모든은,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닥칠 죽음의 형태와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 


10년 후의 대한민국. 국회에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발의되고 국민투표를 통해 법안이 통과되자 '지혜'의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수명 계획'을 가족들에게 밝히고 신변 정리를 시작한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아흔일곱의 언니가 병상에서 생을 연명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할머니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건 너무 비참하다며 비자발적으로 죽음을 맞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기로 결정한다. ​ 


지혜의 가족들은 할머니의 결정에 대해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어떤 이는 처음부터 개인의 선택이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머리로는 받아들여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떤 이는 울며불며 결사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혜는 할머니의 결정에 대해 가타부타 의견을 밝히지 않은 채 언니의 요청에 따라 할머니에게 자두 술 담그는 법을 배운다. 한편으로는 할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고 준비하는 것처럼 자신 또한 부모님의 집을 떠나 독립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 


편안할 안(安) 자와 즐거울 락(樂) 자를 써서 안락사라고 해도, 그 과정과 결과가 결코 안락할 리 없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의 할머니와 할머니를 지켜보는 가족들 역시 때때로 참담한 심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사가 필요한 것은, 준비된 이별이 준비 없는 이별보다 떠나는 사람과 남겨질 사람 모두에게 그나마 상처를 덜 남기기 때문이다.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영영 떠나보내야 했던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준비 없는 이별이 남기는 상흔이 얼마나 깊고 오래가는 지 알 것이다. ​ 


소설에서처럼 10년 안에 한국에서 안락사가 합법화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안락사 법안 통과 여부와 상관없이 육체와 정신이 모두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보고 대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재산이나 채무, 소유하고 있는 물건 등을 정리하고, 사는 동안 고마웠던 사람, 미안했던 사람, 좋아했던 사람, 사랑했던 사람에게 그 마음을 전한다면 죽는 일은 물론 사는 일 또한 훨씬 높은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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