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의 시대 - 일, 사람, 언어의 기록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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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교훈이니 사훈이니 하는 것을 수두룩하게 접했어도 크게 신경 쓰고 살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대리사회> 등을 쓴 김민섭 작가의 신간 <훈의 시대>를 읽으니 나 또한 의식 또는 무의식중에 수많은 '훈(訓)'에 노출되고 영향받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이란 집단에 소속된 개인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의 언어이자, 지배계급이 생산, 해석, 유통하는 권력의 언어이자, 한 시대의 욕망이 집약된 욕망의 언어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에게, 회사에서는 사장이 임직원들에게, 국가에서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단어로, 문장으로, 서사로 훈을 전달하며 '-해야 한다'는 지침을 끊임없이 교육하고 강요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같은 수사들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제1장에서 훈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한 다음, 제2장에서 학교의 훈, 제3장에서 회사의 훈, 제4장에서 개인의 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학교의 훈으로는 교훈과 교가가 있다. 저자는 공립여자고등학교와 공립남자고등학교의 사례를 중심으로 교훈과 교가라는 학교의 훈들이 어떻게 개인의 몸과 언어를 통제해 왔는지 살펴본다. 저자의 조사에 따르면 여자고등학교의 교훈과 교가 중에는 순결, 정숙, 딸, 어머니 같은 단어가 유난히 많이 들어 있다. "순결함은 우리의 자랑", "어여쁜 겨레의 딸", "겨레의 참된 어머니", "알뜰히 부덕을 닦아" 같은 표현이 그 예다. 저자는 남자고등학교나 남녀 공학인 고등학교의 교훈이나 가사에는 이런 표현이 전무하며, 이런 표현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 학교와 교사로부터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지 염려한다. 


여기에는 교훈 개정의 어려움이 한몫하기도 한다. 강원도 원주여자고등학교의 교훈은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이다. 일부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교훈이 마뜩잖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학교 측은 설문 조사를 실시했고, 절반이 훨씬 넘는 학생, 학부모, 교사가 개정에 찬성해 사실상 개정이 결정되었다. 문제는 원주여고 총동문회였다. 교훈이 개정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총동문회는 만장일치로 반대 의사를 전했고 결국 개정이 무산되었다. 총동문회의 명분은 "시대가 변해도 교훈은 변하지 않는 학교의 긍지이며 전통"이라고 했다. 저자는 팔순이 넘는 초기 졸업생들이 교훈에 따라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로서 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언어에 동일시되었고, 그 결과 교훈이 바뀌는 것을 자신의 존재, 정체성이 바뀌는 것처럼 여기게 된 것은 아닌가 분석한다. 


훈이 중요하고 무서운 건 이 지점이다. 집단은 집단의 자기 보전을 위해 구성원의 욕망을 억압하고 집단의 욕망을 강제한다. 집단 내부에 있는 구성원은 개별적인 욕망을 거세당하고 집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인 양 받아들이게 된다. 저자는 이를 "'갑'을 위한 대리전쟁을 수행하는 '을'"이라고 표현한다. 원주여고의 사례에서 총동문회가 주장하는 가치는 사실상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이익이다. 수많은 회사들이 임직원들에게 강요하는 사훈도 마찬가지다. '고객만족을 최우선 가치로', '남들보다 두 배 더 일하라' 같은 사훈이나 슬로건, 표어를 내세우며 상사가 부하를, 선배가 후배를,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채근하거나 닦달하는 일이 왕왕 벌어지지만, 그래봤자 다들 회사라는 갑에 속한 을들에 불과하며, 갑의 논리를 대신 펼치는 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저자는 광고 문구나 베스트셀러 책 제목에 드러나는 한국인의 욕망을 분석한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증명합니다'라는 광고 문구는 대형 건설사의 브랜드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고, 그것이 곧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고 여기는 일부 한국인들의 속물근성을 파고들었고 잘 통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곰돌이 푸 :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무례한 사람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법> 등의 베스트셀러 책 제목은 오늘날 한국인들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저자는 앞으로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서울 살던 사람이 이혼하거나 직장을 잃으면 부천으로 가고, 거기서 더 살기 어려워지면 인천 중구나 남구로 옮긴다" 등의 막말도 연구해볼 생각이라는데 무척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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