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퀴어 -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
박차민정 지음 / 현실문화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나는 이 책이 조선 시대의 동성애자들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조선 시대에 관한 책도 아니고 동성애자들만 다루는 책도 아니다. 나라면 '일제 강점기 조선 민중들의 성(性) 생활사(史)'라는 제목을 붙일 것 같은데, 그러면 너무 딱딱해서 아무도 안 읽으려나? 아무튼 내용이 짐작한 것과 달라서 놀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책에 실망한 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 정말 좋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인상 깊었던 대목을 순서대로 꼽자면, 첫째는 일제 강점기에도 여성 혐오 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1932년 12월, 경성역에서 23세의 청년이 체포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의 혐의는 정무총감 부인의 옷을 면도칼로 찢었다는 것이었다. 나카지마 신길이라는 일본인 남자는 평소 여자를 몹시 증오하는 '변태심리'를 가지고 있었고 여자들의 옷을 찢을 목적으로 항상 면도칼을 상비했다. 당일에 하필 정무총감의 부인의 옷을 찢은 것도 그가 단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자를 증오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신문에 등장한 최초의 '변태성욕자'는 남의 변소 문틈으로 "고개를 넣고 음부를 쳐다보는 버릇이 있던" 29세의 일본인 청년이다. 이 같은 범죄는 오늘날 횡행하는 몰카(불법 촬영) 범죄를 연상케 한다. 


둘째는 조선 시대에 남색이 존재한 정도가 아니라 크게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혼마 규스케가 쓴 책 <조선잡기>(1893)에는 조선팔도 가는 곳마다 남색이 유행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적혀 있고, 1970년대의 이규태 칼럼에는 남색이 남성들이 치르는 일종의 성인례로서 존재했다고 쓰여 있다. 1940년대 강원도 지역의 섹슈얼리티 지형을 탐구한 민족지 연구 <1940년대의 '남자동성애' 연구>에 따르면 해당 지역에서 한국전쟁 이전까지 남색은 일종의 관습으로서 존재했다. 이 지역에서는 동년배 성인 남성들 간에 맺어지는 파트너 관계를 '맞동무', 성인 남성과 소년 사이에 이뤄지는 파트너 관계를 '수동무'라고 분류했다. 


셋째는 여성의 사랑이다. 여성의 경우, 대상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여성이 주체적으로 사랑을 하고 성관계를 맺는 건 무조건 허용되지 않았다. 일제는 형법으로 13세 미만의 여성을 대상으로 성행위를 하는 것을 금지했으나 조혼은 막지 않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열 살 전후에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남자에게 팔려가듯 시집가서 성관계를 강요당했다. 1934년 <동아일보>에는 71세 노인 정동수가 17세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 사실에 분노해 아내의 국부를 성냥불로 지져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더 끔찍한 건 이 아내가 처음 정동수의 집에 왔을 때 고작 7세였다는 것이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건, 근대화가 시작되고 학교와 직장이 생겨나서 여성이 전통적인 가족 단위를 벗어나 임금노동을 통해 자립할 수 있게 되고 나서부터다. 그중에는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여성들도 있었다. 주로 여학교를 중심으로 선배와 후배 여학생들 사이에서 혹은 여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 로맨틱한 우정 또는 사랑의 감정이 꽃피었다. 이들은 서로를 'S(언니/동생)'이라고 불렀다(오래전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X언니, X동생 같은 호칭은 S언니, S동생이 잘못 전해진 게 아닐까?). 


저자는 마치는 글에서 경의선 철길 복개가 이루어지기 전 이화여대 정문 앞에 놓여 있었던 '이화교'를 소개하며 자신이 재학 시절에 들었던 전설을 소개한다. 두 명의 이화여대 재학생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동반 투신자살을 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이화교였다는 전설이다. 저자는 전설의 모티프를 제공한 사건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1931년의 '홍옥임, 김용주 철도정사 사건'이 아닐까 추측한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선배로부터 들었던 이화교의 전설을 이 책에서 다시 접하게 될 줄이야. 반갑기도 했지만 등골이 오싹하기도 했다(팩트는 살짝 다르지만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