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타인에게 일어난 사건이 기묘할 정도로 강렬하게 자신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경우가 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의 저자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도 그런 경험을 했다. 1992년, 하버드 법대에 재학 중이던 저자는 방학 동안 루이지애나의 한 법률 사무소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근무 첫날, 저자는 이상하게 자신의 마음을 잡아끄는 한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1983년, 리키 랭글리라는 사내가 이웃에 사는 여섯 살 소년 제러미 길로리를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후 방치한 사건이다. 


이 책은 저자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와 가해자 리키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저자 역시 리키나 제러미 못지않은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임이 드러난다. 1978년, 정부 변호사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슬하에서 쌍둥이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저자는 겉보기엔 부족할 것이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형사 전문 변호사로 개업해 열심히 가족들을 부양했고, 어머니는 법대에 진학해 가사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쌍둥이 오빠는 병을 앓았지만 점점 건강해졌고, 뒤이어 태어난 동생들은 사랑스러웠다. 


문제는 할아버지였다. 저자의 할아버지는 저자와 여동생들이 어릴 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했다. 저자는 훗날 이를 부모님에게 말씀드렸지만 부모님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고, 고통은 오로지 저자의 몫으로 남았다. 법대에 진학해 리키 랭글리 사건을 알게 된 저자는 아동 성폭행 피해자인 제러미와 가해자인 리키에게서 어린 시절의 자신과 할아버지를 본다. 그때까지 저자는 사형제 폐지론자였지만 리키 랭글리만큼은 사형을 선고받길 원했다. 리키가 죽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제러미의 어머니 로렐라이가 리키의 선처를 요청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낳은 아들을 잃은 로렐라이가 도대체 왜 아들을 죽인 가해자의 선처를 요청하는 것인지 저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렐라이는 재판정에서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자신 또한 리키를 용서한 것은 아니다. 아니, 평생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리키가 사형을 당하면 리키의 어머니 베시가 나처럼 아들을 잃게 된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늘려선 안 된다. 저자는 로렐라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묻혀 있는 고향으로 향한다. 


이 책은 가정 내 성폭행 및 아동 성폭행 피해자인 저자가 자신을 겁탈했던 가해자와 자신을 방관했던 주변 가족들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다. 화해에 이르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저자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했다가 더 큰 상처를 입는다. 저자의 부모는 저자가 그 사건을 언급하는 것을 여전히 꺼린다. 저자의 오빠는 저자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며, 저자와 마찬가지로 할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저자의 여동생은 사건 자체를 잊기로 결심했다. 


저자는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이 겪은 일을 무시하고 홀대해도 자신은 끝까지 그 일을 기록하고 알리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가해자를 드러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저자 자신이 입은 피해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저자는 실제로 리키 랭글리 사건을 조사하고 이 책을 집필하면서 끔찍하게만 여겼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새롭게 보게 되었고,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도 깨닫게 되었다. 부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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