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한국 문학 사상 (아마도) 전무한 고령의 여성 킬러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SNS 상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소설이다. 나 역시 그 말에 혹해 이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마침 2013년에 출간된 초판과는 다른 옷을 입은 개정판이 출간되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구입해 읽어보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40여 년간 청부살인을 업으로 삼고 살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爪角)'. 언뜻 보기에는 노년의 정석에 가까운 모자라지도 않고 튀지도 않은 차림을 한 일반적인 중산층 노인으로 보이지만, 동네 아니면 백화점 이월 행사장에서 샀을 법한 옷 아래엔 오랜 운동과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있고, 옷과 가방 속에는 언제라도 목표물을 해칠 수 있는 무기와 시체 처리 도구가 숨겨져 있다. 몸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아 퇴물 취급받지만, 조각 자신은 언제든 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다면 기쁘게 맞으리라는 각오로 집을 떠난다. 


이 소설의 첫 장면은 부디 영상으로 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 만큼 강렬하고 짜릿하다. 퇴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 안. 선 채로 꾸벅꾸벅 졸던 50대 후반 남자가 잠에서 깬 게 민망했는지 공연히 마주한 의자에 앉은 젊은 여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찌른다. "아저씨 왜 그러시죠?" 여자가 묻자 아저씨가 답한다. "아저씨이? 젊은 년이 눈 똑바로 뜨고 대드냐. 잘한 것 있냐. 노인 앞에 두고 모른 척 핸드폰이나 처들여다보는 주제에." "네, 할아버지, 저 임신했어요." "요즘 젊은 년들은 죄 결혼도 작파하고 애새끼도 안 뽑고 의무를 게을리하는 주제에 저 편할 때만 임신 타령이지. ... 너 혼자만 애 뱄냐? 혼자만 애 낳아?" (12-3쪽 인용) 


이 밖에도 한국에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직접 겪었거나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을 불편부당한 상황이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 딸은 살림 밑천이라며 부려먹을 때는 실컷 부려놓고 버릴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리는 부모라든가, 여자란 그저 만지고 넣을 대상일 뿐인 짐승보다 못한 남자들이라든가, 나이 든 여자는 누구나 결혼하고 아이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들이라든가. 그러나 말거나 도도하게 제 갈 길 가고, 발에 걸리는 돌부리가 있으면 시원하게 걷어차주거나 안 되면 으스러질 때까지 밟아주는 조각의 모습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사랑에 그답지 않게 설레하던 모습도. 참고로 전철에서 임신부를 괴롭히던 아저씨는 몇 분 후 조각의 손에 의해 시체가 된다. 오호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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