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ㅣ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전쟁에 참가한 여성들의 잊힐 뻔했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면, <세컨드핸드 타임>은 전쟁이 끝나고 이어진 냉전 이후 공산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확산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철저한 '호모 소비에티쿠스'였다. 호모 소비에티쿠스란 소비에트 시대의 발상, 사고방식, 행동 등이 뿌리 깊이 체화된 소비에트 시대의 인간을 일컫는다. 저자의 아버지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다시피 했고, 저자는 어릴 때부터 '옥차브랴타(만7~9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당 교육, 인성 교육 등을 지도하던 단체)' 단원으로 활동했다.
차세대 공산주의자가 되기 위한 수순을 착착 밟아가던 그가 '진실'을 알게 된 건 페레스트로이카가 시행된 직후다. 기록보관소가 개방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 거주하는 1억 명 중 9,000만 명은 데려가야 한다. 나머지 1,000만 명과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 모두 죽여야 한다.', '사로잡은 부농과 부자들 중 적어도 1,000여 명은 교살해야 한다. ... 주변 수백여 킬로미터 내에 거주하는 인민들이 꼭 그 장면을 목격하게 해서 두려움에 몸서리치도록 해야 한다.'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이 레닌, 트로츠키 등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저자는 더 이상 호모 소비에티쿠스로 살 수 없음을 직감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시행된 이후 저자처럼 소비에트 체제의 진실을 깨닫고 실망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자와 달리 소비에트 체제를 여전히 지지하며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삶을 추구한 사람도 있다. 이들 중에는 소비에트 체제가 무너진 이후 급물살을 타고 들어온 자본주의에 실망한 사람도 적지 않다. 자본주의는 자유를 주었지만, 주어진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 책을 읽고 연극을 보고 인생을 논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돈 버는 법, 돈 모으는 법, 돈 쓰는 법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소비에트 체제하에선 줄곧 모욕을 당해왔던 '속물근성'이 환영받고 장려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체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공포이자 지옥이었다.
사람들은 베르사체와 알마니가 만들어낸 그 헝겊 조각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라며 저를 설득시키려고 해요. 사람은 그것만 있으면 충분하다고요. 삶은 돈과 어음으로 쌓아올린 피라미드일 뿐이고, 자유가 곧 돈이고 돈이 곧 자유라는 말들을 하지요. ... 아무튼 전 제 어린 손주들이 불쌍해요. 가여워요.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매일매일 세뇌당하고 있으니까요. 전 이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아요. 저는 공산주의자였고 앞으로도 공산주의자로 남을 겁니다. (69쪽)
비슷한 일이 지구상에 남은 사실상 유일한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벌어질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공산주의 이외의 사회 체제를 학습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북한 사람들이, 갑자기 자본주의가 유입되고 거대 자본의 횡포를 맞닥뜨렸을 때 과연 잘 버틸 수 있을까. '소련이란 나라는 여성용 부츠와 휴지가 부족해서, 오렌지가 없었기 때문에 무너졌지만, 소련이 무너진 자리에 들어선 러시아는 베르사체와 알마니가 만들어낸 헝겊 조각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생각을 퍼뜨린다고, 이런 세상이 전보다 더 나아진 건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던 유리예브나의 말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