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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20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지 어느덧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 관한 말과 글을 수없이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의 책은 픽션이라기보다는, 여러 해에 걸쳐 수백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한 이야기를 모은 논픽션에 가깝기 때문에 책의 요지를 이해하면 전체를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몇 장 읽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폐기했다. 이 책은 전쟁에 참가했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여성들 중에 200여 명의 증언을 담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할머니이다. 저자의 할머니는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티푸스로 사망했다. 할머니의 세 아들 중 두 명은 전쟁에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었고 한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그가 바로 저자의 아버지이다.
저자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자신의 할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여자들이 남자들과 함께 전쟁에 나가 싸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선 오로지 남자들만이 전쟁에 나갔고, 남자들이 싸우고, 남자들이 적을 죽여서 나라를 구하고 여자들을 지켰다고 가르쳤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자들이 전쟁에 나가 싸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점점 줄었고, 새로운 세대는 전쟁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며, 승리도 패배도 남자들의 몫이고, 여자는 여기에 기여한 적 없고, 기여할 수도 없고, 오직 승(리한 남)자에게 보상처럼 주어지는 전리품이라는 식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나의 엄마 이야기도. 심지어 전쟁터에 나갔던 여자들조차 알려 들지 않았다. 우연히 전쟁 이야기가 시작되더라도, 그건 '남자'들의 전쟁 이야기이지 '여자'들의 전쟁은 아니다. (17쪽)
저자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쟁을 겪었는지를 그 사람의 목소리와 그 사람의 이야기로 일일이 들려준다. 자신을 제외하고 남자밖에 없는 부대에 배치되었는데 하필 생리가 터지는 바람에 곤란했던 일, 병원에서 야간 당직을 서고 있는데 대위가 가슴을 보여달라고 했던 일, 전장에서 출산을 했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면 적에게 들킨다고 해서 아기를 죽인 일 등 그동안 역사 책은 물론이요 소설, 영화, 드라마 그 어떤 매체를 통해서도 접해본 적 없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줄줄이 나온다.
저자는 말한다. "전선이니 전선의 활약이니 진격과 퇴각이니 그런 이야기, 전복된 열차가 몇 대고, 빨치산의 기습공격은 어땠는지 따위의 이야기가 필요한 걸까? 이미 수천 권도 넘는 책들에 등장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저자는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전쟁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고 영웅들이 얼마나 훌륭한가'가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피폐해지고 파괴당했는가'라고 설명한다. 전투의 명칭이나 전사자 수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어린 소녀들이 참전을 종용하는 프로파간다에 혹해 총을 쏘고, 지뢰를 던지고, 폭격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남성과 똑같이 총을 들고 전쟁에 나가 싸웠다는 것은 그들의 '여성성'이 '훼손당한' 것을 뜻하기 때문에 참전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말하고 싶어도 침묵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이다.
더욱 충격적인 건 이런 내용을 고발하는 이 책이 전쟁의 위업을 훼손하고 참전자들의 명예를 모독한다는 이유로 여러 부분을 검열, 삭제당했고, 작가가 재판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직접 체험한 일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훼손되는 '위업', 모독당하는 '명예'란 무엇일까. 세상의 진실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여자의 얼굴, 여자의 목소리, 여자의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